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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6.10 19:22 수정 : 2015.06.11 10:34

부탄의 4대 국왕 환갑맞이 책 읽기 행사.

[매거진 esc] 김소민의 부탄살이

지난 5월23일 토요일인데 아침 8시께부터 동네가 시끌벅적하다. 수도 팀푸 시내 중심광장인 시계탑 주변으로 부탄 전통옷 형태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손에 책 한권씩 들었다. 다 영어책이다. 마이크에서 선생님들 구호 소리가 울렸다. 아이들 500여명이 정렬해 자리를 잡자 4대 국왕 환갑맞이 책 읽기 행사가 시작됐다.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고 쓰는 사람이 이끄는 사람이 됩니다.” 전통 여성복장인 키라를 입은 10살 소녀가 똑 부러진 영어로 대표 연설을 했다. 곧 20여분 동안 다 같이 침묵 속에 책을 읽어야 했다.

개들마저 조용한 와중에 소년 페마(11)는 근질근질한가 보다. 두루마기 형태의 고에 긴 양말을 신은 그는 ‘라면땅’을 닮은 과자를 살짝 꺼내 부숴먹었다. 인도에서 온 과자인데 양파오일을 끼얹어 먹는 것만 빼면 내가 한국에서 중독됐던 바로 그 맛이다. 사진 찍어도 되냐니까 갑자기 책을 펼쳐 들고 읽는 포즈를 취했다.

페마에 비하면 세 살 많은 초뎀은 정신연령이 누나라기보다는 이모다. 단짝 친구인 칼둥과 우산을 나눠 썼다. 햇살이 쨍했다. 둘이 들고 있는 영어책 두께는 300쪽은 족히 넘어 보인다. 수줍은 칼둥의 말끝에 웃음이 굴러다녔다. 초뎀은 카리스마가 있다. 문장 마지막까지 힘줘 말했다. 엄마뻘인 내가 주눅이 들었다. 나보다 영어가 유창하다. 그 친구들은 부탄 공식 언어인 종카어보다 영어로 읽고 쓰는 게 더 편하단다. 종카어로 말하지만 쐐기형태 종카 문자는 단어마다 지뢰밭이다. 모험소설을 좋아한다는 초뎀은 일본에 가 건축공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부탄 전통이 자랑스러워요. 외국인들이 다 그래요. 오염되지 않고 특별하다고요. 그래도 세상이 변하는데 우리만 가만히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해요. 팀푸를 현대적인 도시로 만들고 싶어요.” 친구 칼둥은 나중에 한국에서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더니 까르륵 웃었다. 그사이 무대엔 초록색, 파란색 옷을 입은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서 있고 곰으로 분장한 듯한 소년이 그 사이를 정처 없이 오락가락했다. 전교회장 같은 초뎀은 사는 동네 이름과 부모님 핸드폰 번호를 적어줬다. “우리집에 놀러 오세요.”

이틀 후 어쩌다 가본 ‘종카 랭귀지 스쿨’은 산 중턱에 난데없이 서 있었다. 택시 운전사는 비포장도로를 아슬아슬 올라가며 추가 요금을 불렀다. 외국인인 내가 다짜고짜 종카를 배우겠다니까 학교 안내실 직원이 난감해했다. 여기는 어학원이 아니라 한국으로 치자면 외국어고등학교쯤 되는 곳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직원이 칠립(외국인) 폭탄을 교장선생님에게 넘겼다. 설립자인 타시(46)다. 배우 백일섭씨를 닮았다.

부탄에선 6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곧바로 영어로 수업이 진행된단다. 종카어로 가르치는 수업은 두 과목, 종카와 문학뿐이다. 종카어가 공식 언어이지만 이 나라엔 네팔어, 샤르촙어까지 대표 언어만 세 가지다. 11~12학년이 되면 예술, 과학, 경제 분야로 나뉜다. 앞으로 전공하고 싶은 분야를 대충 정하는 거다. 국립학교는 전 과정이 무료인데 사립학교는 1년에 약 55만~85만원을 내야 한다. 이 학교는 부탄에서 유일하게 종카어에 방점을 둔 사립학교다. “언어를 잃는 건 우리 문화를 잃는 거예요. 종카어는 불교사상에 맞닿아 있는 언어라고요.”

그래서 타시가 3년 전 사비를 털어 학교를 세웠는데 입학생 수가 지난해 273명에서 올해 120명으로 반 토막 났다. 내년엔 더 줄까 속이 탄단다. “돈 있는 집 부모들은 자식들한테 경제나 공학을 가르치고 싶어하죠. 종카어는 ‘라스트 초이스’인 거 같아요.”

타시의 또다른 걱정은 딸 넷이 한국 드라마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거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단다. 나는 말 안 듣는 거야말로 진정한 딸들이란 증거라고 위로했다. 그래도 공부를 잘한다며 은근히 자랑했다. 큰딸은 국립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다. 나머지 셋은 다른 사립학교에 다닌다. 왜 자기가 세운 학교에 안 보냈냐니까 타시, 당황했다. “하하, 좋은 질문이에요.” 부탄 백일섭씨의 볼이 붉다. “저도 아버지잖아요. 이 학교 나와 딸들에게 좋은 미래가 열릴까 걱정되는 거죠.”

타시는 특별히 부처님상이 모셔진 학교 제단 사진도 찍게 해줬다. 음악실에선 기타를 닮은 전통 악기 현도 몇 가닥 튕겼다. 멋지다니까 치는 척만 해본 거라며 쑥스러워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수업이 이어지는데 막 점심시간이다. 책상을 붙여 둘러앉은 학생들은 보온도시락 통을 꺼내 놨다. 운동장 농구 골대 옆에 앉은 여학생 두 명은 니컬러스 스파크스의 러브스토리를 읽었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난리다. “<드림하이>를 좋아한다”며 한국인들은 다 그리 예쁘고 피부가 곱냐고 하기에 날 보라고 답해줬다.

낮의 팀푸 거리를 거닐면 족히 60~70%는 전통옷 차림이다. 특히 행정기관이자 종교기관인 종에 갈 때는 키라와 고 위에 숄 형태인 라추도 걸쳐야 한다. 네마(25)는 “키라를 입으면 우아해지는 느낌이 든다”며 “특히 긴치마라 신발을 아무거나 신어도 되는 게 편하다”고 했다. 오후 5시께 퇴근 러시아워가 끝난 뒤 밤의 팀푸는 옷을 갈아입는다. 명동 거리에 데려다 놔도 어색하지 않을 멋쟁이들은 바로 향한다. 킹가는 우스개처럼 말했다. “나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부탄인인가봐.” 고 입은 모습만 봤던 킹가가 가죽점퍼와 찢어진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났을 때 나는 그를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김소민 자유기고가, 사진 김소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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