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1.06 20:22
수정 : 2016.01.07 10:58
|
부탄 영화 <크로스로드>. 사진 김소민 제공
|
[매거진 esc] 김소민의 부탄살이
잊지 못할 영화였다. 그 영화를 본 지 2주나 지났건만 아직도 생생하다. 만화경 같은 영화다. 내가 처음 본 부탄 영화 <크로스로드>다. 무슨 장르의 영화였냐고 묻지 말아달라. 모르겠다.
“선상님, 나 영화 나와요.”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텐진(25)은 한국에서 2년 살았다. 안동에서 부탄 탈춤을 췄단다. 나랑 두달 더 공부했다. 여전히 ‘선생님’을 ‘선상님’으로, ‘뭐야’를 ‘뫄야’라고 한다. 나는 아무래도 좋은 선생은 아닌 거 같다. 텐진은 영화 출연에 잔뜩 들떠서 친구를 불러모았다. 그렇게 팀푸에 단 하나밖에 없는 영화관에 나도 가게 됐다. <스타워즈>이런 건 명함도 못 내미는 콧대 높은 영화관이다. 부탄 영화관은 부탄 영화만 튼다.
표값은 150눌트룸(약 3000원). 팝콘도 샀다. 300석은 족히 되는데, 80% 정도 찼다. 첫 장면은 학교 기숙사다. 남자 주인공 도지가 잠에서 깨는 걸로 시작한다. 도지는 여주인공 소남을 짝사랑한다. 소남은 다른 남자랑 눈맞았다. 여기까지는 1970년대 <얄개들>을 닮은 학원 코미디물인 거 같다. 그러다 볼리우드(인도 영화)풍으로 돌변, 여자 주인공과 두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데 춤은 오른손 왼손 앞뒤로 살짝살짝 내미는 정도다. 노래 부르는 동안 여주인공이 옷을 계속 바꿔 입고 나온다. 왜 그는 오색 기도 깃발(사람들이 기도문을 적어 매단 깃발)이 흩날리는 다리에서 검정 이브닝드레스를 선보였던 걸까?
그리고 졸업. 텐진은 이 졸업식에 참석한 엑스트라다. 감독이 친구라서 출연하게 됐다는데 ‘감독이 친구가 많지는 않구나’라고 조심스럽게 점쳐본다. 졸업식인데 학생 포함해 참석자가 열명이 안 된다. 하여간 그 뒤로 남녀 주인공과 친구들 여섯이 등산을 가는데, 한명이 살해되면서 범죄물로 돌변한다. 그런데 잠깐, 왜 엑스트라 버스 운전사가 나중에 벌목꾼으로 나오는 걸까?
하여간 남자 주인공 도지가 살인범으로 밝혀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여주인공 소남을 도지가 쫓는다. 왜 도지의 자동차는 하이힐을 신은 소남보다 느린 걸까? 여기서 다시 영화는 심리스릴러로 급회전한다. 도지는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던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남을 좋아했는데 학교 선생님이었던 소남 아버지가 도지를 미워해 구박했다. 마지막에 도지의 병세에 대해 의사가 길게 설명한다. 그동안 도지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휠체어에 앉아 있다. 그런데 왜 도지는 의사용 수술복을 입고 있는 걸까? 2탄을 위한 복선인가?
자막이 없어 텐진이 통역을 해줬다. 가끔 진짜 도움이 됐다. 도망가는 여주인공을 도지가 결국 잡고 한밤의 건설 현장에서 협박하는 장면이었다.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왜 웃긴 걸까? “선상님, 액팅(연기)이 웃겨요.”
텐진의 통역 덕에 영화는 더 심한 ‘컬트’가 돼가고 있었다. 여자 주인공이 어떻게 도지가 범인인 걸 알게 됐냐고 물었더니 텐진이 그런다. “칼에 코가 있어. 칼에 코가 있어.” 범인이 코를 잘랐단 말인가. 이 영화는 공포물인가? 텐진이 하려던 말은 ‘칼에 피가 묻어 있었다’는 거다. ‘코피’라는 한국어 단어를 아는데, ‘코’랑 ‘피’랑 헛갈렸단다.
중요한 건 안 졸았다는 거다. 웬만하면 영화관에서 고개가 꺾이는데 인터미션까지 있는 2시간 넘는 상영시간 동안 안 잤다. 관객이 언제 웃는지 그 미스터리한 순간을 기다리는 게 흥미진진해서 잠이 안 왔다.
깊은 잔향을 남기는 영화다. 궁금해서 결국 텐진을 닦달해 친구인 감독 카르마 상게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유학중인 부인을 따라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어서 페이스북으로 연락했다.
왜 버스 운전기사가 갑자기 나무 자르는 노인으로 나오는가? “나무 자르는 노인을 따로 섭외하긴 했다. 그런데 배우가 현장에 안 나타났다. 외딴곳에서 촬영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운전기사 역 배우한테 그것까지 하라고 했다. 운전기사가 잠깐 나왔기 때문에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 뭘 말하고 싶었나? “부탄에서 만들어진 적이 없는 여러 장르를 시도했다. 주제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성인이 된 뒤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이다. 아동학대를 방지해야 하는 이유다.” 다음 영화는? “코미디를 시도해보고 싶다.”
마틴 스코세이지와 리안 감독을 좋아하는 카르마 감독은 중견이다. 제작한 영화가 3편, 감독한 작품은 8편이다. 이 영화는 250만눌트룸(약 4200만원) 들었다. 죄다 제작진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다. 투자자 눈치 볼 일은 없는데 그렇다고 마음대로 다 하는 건 아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감독 기관의 심의를 받는다. 섹스신 못 넣는다. 카르마 감독은 부탄에서 영화 만드는 데 가장 큰 장애물로 시장이 너무 작다는 점을 꼽았다. 부탄 인구 다 합쳐봤자 80만 정도이고 영화관도 8개뿐이다. 또 다른 걸림돌은 제작진이 ‘만능 드라이버’가 돼야 하는 거다. 감독이 촬영, 편집, 음향 다 해야 할 때가 많단다.
어쨌거나 카르마 감독은 <크로스로드>로 이익을 남길 걸로 점치고 있다. 한번 걸리면 보통 두달은 쭉 간다. 1년에 20개쯤 부탄 영화가 나오고 영화관에선 부탄 영화만 트니 상영관 잡기도 쉽다. 게다가 관객이 든다. 솔직히 나한테 <크로스로드>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관객이 들었다는 거였다. 웬만한 집 텔레비전 켜면 채널이 50개 넘는다. 볼리우드·할리우드 영화, 드라마 다 나온다. 그런데 왜 이 영화를 보러 돈까지 내고 극장에 올까? 텐진의 대답은 이랬다. “선상님, 여기서만 부탄 영화가(를) 볼 수 있어요.”
김소민 자유기고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