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2.03 20:16
수정 : 2016.02.0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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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소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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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소민의 부탄살이
왜 내 몸은 자꾸 내 뒤통수를 치는 걸까.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생 텐진(25)이 고향집에 초대했다. 1년에 한번 온 식구가 모여 일종의 굿인 ‘푸자’를 한단다. 스님들이 이틀 내내 머물며 불경을 읊는다. 텐진의 고향은 수도 팀푸에서 차로 3시간 거리인 푸나카, 그것도 산꼭대기다. “부탄 전통 집이에요.” 그 말은 곧, 수세식 화장실이 아닐 확률이 크다는 거다.
나는 비운의 공주다. 돈도 없고 미모도 없는데 까탈만 공주다. 텐진 집으로 가는 날 아침부터 장 비우기에 들어갔다. 텐진 고향집에서 되도록 화장실 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거다. 아무리 긴 대장이라도 이 정도면 됐겠지 싶었다.
푸나카로 가는 버스가 없어 택시를 나눠 탔다. 값은 300눌트룸(약 6000원), 티코 크기 차에 다섯이 꽉 차기 전엔 출발 안 한다. 짐까지 채우니 내 다리가 네 다린지 내 다린지 모르겠다. 이 살뜰한 택시가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승객들은 기절 상태 수면에 빠졌다. 안전벨트도 안전펜스도 없고 비포장 좁은 길 반대편에서 트럭이 오고 있지만, 눈 부릅뜨고 있으면 뭐하나. 괴롭기만 하다.
부탄에서는 이 정도는 돼야 식구가 있다 하나 보다. 30여명이 모였다. 이름이 소남인 사람만도 셋이다. 화장실은 예상대로 집 밖에 있었다. 개량된 푸세식으로, 쪼그리고 앉았을 때 적어도 널빤지가 흔들거리며 서스펜스를 조장하진 않았다. 제단 앞엔 공양물이 산맥을 이뤘다. 내가 가져간 컵케이크부터 사탕, 초콜릿, 고기 등이 일단 부처님 몫이다.
일단 뭘 자꾸 먹어야 했다. 밥 스케일이 히말라야다. 이 식구를 먹여대자니 일이 어마어마하다. 밥 나르고 설거지하는 게 여자들 몫이다. 참고로, 세계경제포럼이 내놓은 2015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를 보면, 145개 나라 가운데 부탄은 118위, 한국은 115위다. 그래도 적어도 며느리가 독박을 쓰는 것 같진 않다. 이 집의 좌장은 텐진의 외할머니다. 부탄에선 결혼하면 남편이 처가로 들어와 사는 경우가 많다. 땔감은 남자들이 해왔다. 반찬은 살보다 비계가 많은 돼지고기 요리 팍샤 등인데 고기 요리는 텐진 아버지 솜씨다. 나는 밥만 죽자고 먹었다. 그때부터 불안했다. 그렇게 아부를 해놨는데도 장이 시비를 걸었다. 이 똥들은 어디에 잠복해 있었던 걸까.
이틀 일정의 푸자가 이날 저녁 8시께 끝났다. 텐진 부모님은 농부다. 어머니는 이 동네에서 목청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 어머니와 아버지, 이모, 삼촌들이 둥그렇게 둘러섰다. 원이 돌았다. 음악은 라이브다. 이 노래는 끝이 없다. 어머니는 야크 유목민부터 시작해서 부탄을 통일한 샵둥 나왕 남겔, 부탄의 전통 건물인 종의 역사까지 노래로 이어갔는데, 이 노래들을 아이들까지 다 아는지 곧 떼창으로 번졌다.
부탄 전통춤을 처음 봤을 때 ‘애걔, 이게 뭐야’ 했다. 동작이라고 해봤자 팔 한 짝씩 앞뒤로 뻗었다 거둬들이고 한 발씩 디뎠다 거두는 정도다. 그러면서 계속 돈다. 그걸 관객 입장에서 보면 최면 걸리듯 잠에 빠져들기 일쑤다. 그런데 이 가족과 함께 춰보니 알겠다. 단순한 동작이라 따라하기 쉬우니 걸음마만 떼도 떼춤이 가능하다. 팔 한 짝 폈다 접는 동작인데 같이 추니 말춤 뺨치는 거다. 역시 막춤과 떼춤이 최고다. 네 살짜리 꼬마가 원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굽혔다 폈다. 같이 노래하고 움직이며 이들은 공동체를 손으로 만지고 있는 중이었다.
완벽하게 화목한 가족이 어디 있겠나. 텐진은 팀푸에서 사촌 집에 얹혀산 지 2년이 다 돼 간다. 여행사에서 일하는 텐진의 월급은 8000눌트룸(약 16만원)이다. 그중에 3000눌트룸(6만원)을 부모님한테 보내니 사촌 집에서 나올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촌의 구박도 늘었다. 언젠가 텐진이 그랬다. “채소 안 사오면 사촌이 화내요. 나쁜 말도 해요.” 어찌 됐건 적어도 지금 함께 돌고 있는 텐진과 사촌의 얼굴에는 갈등의 그늘이 안 보인다. 일단 한번 춰보면 안다. 흥이 나서 다른 생각이 안 난다.
내부의 적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날 밤 행복할 수 있었다. 부탄 가족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가는 바깥 화장실이 저승이라도 되는 양 수세식 변기에 길들여진 몸은 한사코 버텼다. 똥장군들의 진격은 무서웠다. 가족들과 함께 땀 흘리며 원을 돌면서 나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이렇게 다같이 돌고 있는 와중에 방귀를 뀌면 이 가족들의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다.’
밤 12시가 다 됐는데도 춤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12살짜리 소녀 위겐은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지난해 푸자 때는 새벽 5시까지 춤췄어요.” 오! 부처님. 제 공양물인 컵케이크는 별로였나요?
내 절절한 마음을 읽은 걸까. 새벽 1시께 이모할머니가 말했다. “이제 마지막 노래를 부르자.” 노래는 이랬다. “더도 덜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음 해에도 우리 함께 모일 수 있기를.” 이 노랫말이 무려 15분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다.
드디어 누울 수 있게 됐다. 식구들이 이부자리를 봐줬다. 서 있을 때보다 항문으로 몰리는 하중이 줄어선지 화장실 욕망이 고요해졌다. 휴전인가? 이모할머니가 옆에 앉더니 담요를 내 턱까지 바짝 끌어당겨 덮어줬다. 이모할머니 말을 내 옆에 누운 텐진의 여동생이 통역했다. “너한테 노래를 많이 불러주고 싶었어. 즐겁게 해주고 싶었어. 내가 감기 들어 그렇게 못했구나. 우리는 네가 와서 아주 행복했어. 너도 행복했니?” 그때 한 낱말이 떠올랐다. ‘엄마.’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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