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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03 18:35 수정 : 2013.07.24 10:12

[매거진 esc] 시계태엽 패션

남현지 디어매거진 편집장
나는 오른쪽 둘째 발가락이 유난히 길다. 거의 발가락이 한 마디 정도 더 있는데, 그래서 옛날부터 발에 꼭 맞는 신발이 별로 없었다. 신발을 짝짝이로 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오른쪽 발에 사이즈를 맞추다 보면 항상 조금 큰 신발을 신어야 하거나, 발가락이 조금 접힌 채 작은 신발에 발을 구겨 넣어야 했다. 이런 특이한 발 모양에도 편했던 신발은 벨크로(찍찍이)가 달린 겨자색 랜드로바 스니커즈였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국내 브랜드 랜드로바는 나에게 관심 밖의 대상이 되었다. 또래 친구들이 신는 브랜드인 컨버스나 나이키에 비해 멋져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취재차 이태원의 맞춤신발 가게 ‘슈즈박’에 들렀는데, 진열대에 놓인 다양한 구두들을 보자마자 잡지에서 본, 잘빠진 페니로퍼(사진·끈이 없는 신발인 로퍼의 한 종류, 신발 윗등에 칼집이 난 스트랩 장식에 미국 학생들이 행운을 상징하는 1페니를 끼우기 시작해 페니로퍼로 불리게 됨)를 하나 맞추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개인의 발 형태와 특징에 따라 신발을 만들어준다니, 랜드로바 이후로 찾지 못했던 편하면서도 내게 잘 어울리는 신발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발을 맞추려고 종이 위에 맨발을 올렸다. 사장님이 곧 발을 따라 윤곽을 그렸다. 당연히 나의 오른쪽 발가락이 튀어나온 것도 정확히 그려졌다. 그다음 발등, 볼, 길이, 신발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확한 사이즈들을 쟀다. 살이 물렁살인지 딱딱한지 고려하는 정교함도 엿보았다. 1주일이 지나고, 페니로퍼의 기본 디자인에 충실하도록 요구한 나의 신발이 나왔다. 당연히 오른쪽 신발은 왼쪽과 달랐다. 오른쪽 구두 앞이 조금 더 길고 날렵했다. 그런데 페니로퍼에 정작 페니(penny)가 없기에 사장님께 혹시 10원짜리를 끼워야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장님은 웃으며 서랍 밑에서 1페니만 가득 든 비닐봉지를 꺼내어 뱀프새들(신발 윗등 부분에 칼집이 난 스트랩 장식)에 1페니를 끼워주셨다.

랜드로바 스니커즈 이후, 페니로퍼를 만나기까지 때로는 편안함을 포기하고 소위 ‘브랜드’만을 좇기도 했다. 그사이 한국의 제화산업은 그 옛날 금강제화, 엘칸토, 에스콰이아가 누리던 호황에서 외국 브랜드들의 범람으로 인해 지금의 불황으로 천천히 이행해왔다. 이에 반해 주목할 만한 사실은 최근 몇 년 새 소규모로 전개하는 국내 신발브랜드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슈즈바이런칭엠, 레이크넨, 산슈앤코 등 외국 브랜드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세련된 디자인과 콘셉트로 조용히 인기를 얻고 있다.

이들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80년대 국내 신발브랜드의 시작을 함께했던 기술자들과 제작공장들이 아직 남아 있고, 국내에서 제작자와 젊은 디자이너들이 노력하여 만든 신발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점점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슈즈박에서도 40년이 넘는 경력을 가진 기술자들이 신발을 만들고 있다. 신발을 찾으러 가기 전, 일반적인 수제화 가게에서 나만 유별난 신발을 요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족스럽게도 특이한 내 발에도 편하게 맞고, 나와도 어울리는 구두였다. 가능한 범위에서 다양한 신발을 제작할 수 있는 한국의 제화시장이 새삼 고마웠다.

남현지 디어매거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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