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9.17 22:47
수정 : 2014.09.18 16:59
[매거진 esc] 시계태엽 패션
흔히 패션에서 ‘로스’(loss) 제품이라는 단어를 쓴다. 말 그대로 공장에서 생산한 뒤 남는 제품이다. 예를 들어 브랜드에서 공장에 100개의 옷을 발주했는데 남아 있는 원단으로 모조리 만드니 110개가 나왔다. 그러면 10개가 로스분인 것이다. 혹은 약간 하자가 있어 정식 유통될 수 없는 제품을 말한다. 그러면 이 로스들이 정품보다 훨씬 싼 가격에, 어둠의 경로로 판매된다. 로스의 매력은 디자인, 품질은 정품과 같으나 값이 싸다는 것. 하지만 이때의 로스는 진짜 로스 ‘정로스’고, 흔히 로스라고 불리는 제품 중에는 ‘카피’, 즉 가짜가 더 많다. 가짜에도 A급, 그보다 더 좋은 건 SA급처럼 등급이 있듯, 이 카피 제품들의 원단, 재봉, 디자인 등 품질 면에서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 로스시장은 비단 한국의 상황만은 아니기에, 한국 브랜드 로스 제품도 있지만 외국 브랜드의 로스 제품도 유통업자들이 외국에서 수입해 국내에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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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남현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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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패션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지만, 로스 제품을 산 적이 있다. 길 가다 우연히 들른 옷가게, 옷의 디자인이나 품질이 굉장히 좋았고, 가격은 백화점 브랜드보다는 싸고 보세옷보다는 비쌌다. 그런데 동대문 브랜드 보세옷에도 달린 태그가 이 옷들에는 없거나 댕강 잘려 있었다. 알고 보니 여기가 로스 제품을 취급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물론 전체 로스시장의 비율처럼, 대부분이 카피 제품이었다. 사장님은 자연스럽게 이건 어느 브랜드 카피고, 이건 마감이 좋게 나왔고, 이건 다른 데 가도 못 구한다고 말했다. 사진의 재킷도 이곳에서 샀다. 사장님은 정확히 어디 브랜드인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 브랜드 ‘꼼데가르송’ 스타일인 걸 금방 알아챌 거다. 나 또한 러플이 비대칭으로 달려 있고, 검은색 실크 원단으로 만들어진 걸 보니 누가 꼼데가르송에서 샀다고 하면 믿을 정도였다. 그만큼 품질과 디자인에서 크게 모자라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진짜 꼼데가르송 매장에서 제값을 주고 산 제품들이 여러 개 있다. 그래서 구입하는 데 별로 망설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브랜드를 입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보다는, 그냥 잘 만들어진 이름 없는 옷을 입는 거라고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매년 두 번씩 열리는 해외 패션쇼를 찬찬히 보면 얼마 있지 않아 국내 브랜드 중 적지 않은 수가 비슷한 옷을 내놓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백화점이든, 국내 독립 디자이너 브랜드든, 길거리 보세옷이든 똑같이 적용된다. “거대한 패션 트렌드에 ‘영감’을 받아서”라고 포장할 수 있겠지만, 그냥 특정 브랜드 디자인의 ‘카피’인 경우가 많다. 영감도 너무 많이 받으면, 카피라 부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브랜드의 인지도를 막론하고 너도나도 영감을 받으니, 차라리 로스 제품이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로스의 장점을 가진 ‘중간층’의 브랜드가 없는 것도 로스를 사게 된 큰 이유다. 로스 제품이 유행하는 트렌드를 재현해서가 아니다. 그저 예쁘고 질 좋은 옷을 사고 싶은 지극히도 원초적인 이유에서였다. 최근 해외 패션 웹사이트에서 한국의 한 독립 브랜드가 해외 유명 브랜드의 지난 시즌 옷을 지나치게 따라했다는 기사를 봤다. 원초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줄 브랜드가 출현할 가능성이 멀게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남현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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