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10.29 20:32 수정 : 2014.10.30 10:34

오스트레일리아 브랜드 ‘카카두’(kakadu)의 왁스 재킷. 사진 카카두 제공

[매거진 esc] 시계태엽 패션

최근 뒤늦게 왁스 재킷 대열에 합류했다. 벼르고 벼른 기간만 몇년. 이렇게 시간이 흐른 이유에는 몇가지가 있다. 우선 왁스 재킷의 상징적인 브랜드 ‘바버’를 턱하고 살 만한 여유가 못 됐다. 처음 바버 재킷을 본 건 친구들이 하나둘씩 바버 재킷을 입고 학교에 나타나면서였다. 유럽을 갔다 온 친구가 그쪽 애들은 이 옷 많이 입더라며, 또 가격이 한국보다 훨씬 싸다고 했다. 한국에서 얼마쯤 하나 검색해보니 60만원은 훌쩍 넘었다. 트렌드고 뭐고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관심을 딱 끊었다.

이제 좀 살 형편이 되니 너무 많이들 입고 있었다. 2년도 전 바버 왁스 재킷, 퀼팅 재킷의 인기는 알렉사 청, 이효리 같은 유명인사들의 착용 사진에 힘입어 엄청나게 치솟았다. 가장 기본적인 디자인이자 인기 있는 모델은 ‘비데일’과 ‘뷰포트’. 대부분 둘 중 하나를 사니 남들과 겹칠 가능성도 높아졌다. 친구들 모임에 갔는데 같은 옷을 입고 와서 종일 신경 쓸 바에야 왁스 재킷 하나쯤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 있었으니, 오스트레일리아 브랜드 ‘카카두’(kakadu)의 왁스 재킷이었다. 왁스 재킷의 기본 요소는 다 갖추고 있었다. 20세기 초 어부와 선원들이 입던 방수 옷인 만큼 왁스칠된 원단, 편안한 움직임을 위한 코듀로이 소재의 칼라, 큼지막한 주머니,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탈부착이 가능한 판초(망토) 디테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카카두는 무엇보다 합리적인 가격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1972년에 만들어진 브랜드니 어느 정도 정통성도 있겠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왁스 재킷을 찾은 것이다. 흩어진 드래곤볼 7개를 다 모은 기분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면 일부러 우산을 쓰지 않기도 하면서, 왁스 재킷의 기능성을 뒤늦게나마 체험하곤 했다.

친구도 나처럼 왁스 재킷에 만족하며 입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먼저 왁스 재킷을 입었던 친구에게 왁스 재킷은 너한테 어떤 옷이냐고 물었다. “튼튼하다”, “견고하다”, “심플한 디자인이다” 등의 대답을 할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툭 던지는 말이 ‘프라이타크’(Freitag) 같다는 비유였다. (트럭 방수포를 재활용해 만든 프라이타크 가방도 몇년간 한국에서 굉장한 인기를 누렸다.) “왜?”라고 되물으니 유니폼 같아서란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의 스타일에 왁스 재킷과 프라이타크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왁스 재킷은 따로 세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레 ‘에이징’(aging)이 된다. 가죽 재킷처럼 사용자가 더 많이 움직이는 쪽은 주름이 진다. 또 낡으면 낡은 그 형태가 곧 매력이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뿐인 옷이 되는 것이다. 프라이타크도 마찬가지다.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재활용 원단을 잘라서 만들기에 애초부터 똑같은 가방은 거의 없다.

카카두의 창립자인 리처드 윌러스가 왁스로 코팅한 옷을 만들기 시작한 건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가족들과 오스트레일리아 아웃백에 살던 윌러스는 거친 덤불에도 끄떡없는 일상의 유니폼이 필요했다. 지금 나에게 왁스 재킷은 어떤 옷보다 일상의 유니폼에 가까워졌다. 또한 ‘같음의 두려움’을 벗어나 ‘같음 속의 다름’을 온전히 깨닫는 계기가 됐으니, 왁스 재킷과 내가 함께 늙어가는 일만 남았다.

남현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에디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 남현지의 시계태엽 패션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