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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1.19 20:38 수정 : 2014.11.20 10:15

사진 남현지 제공

[매거진 esc] 시계태엽 패션

최근 개인적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옷을 몇벌 제작했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작업할 당시 입었던 아이템 다섯가지를 재현하는 게 목표였다. 그중 하나가 사진의 로브(사진·Robe)인데, 풀어 말하면 ‘실내에서 입는 무릎 아래까지 오는 길이의 느슨한 가운’이다. 더 쉽게 말하면 ‘목욕 가운’ 스타일이랄까. 두꺼운 울에 넉넉한 핏, 큼지막한 주머니와 숄칼라, 그리고 느슨하게 맨 허리띠까지 100여년이 지난 사진 속 의상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고자 노력했다.

제작 과정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우선 동대문종합시장에 두껍고 부드러운 갈색 울을 찾으러 갔다. 디(D)동 2층 좌판에서 한 마(90㎝)에 1만5000원 하는 원단을 구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패턴 및 봉제사에게 건넬 ‘작업지시서’를 그렸다. 원하는 디자인을 앞과 뒤, 두개로 또렷이 그리면 된다. 총 길이, 소매 너비, 주머니 크기 등 각각 디자인의 치수를 기재하고 그 외 요구사항도 같이 적는다. 패턴사와 수정할 부분은 협의를 하고, 또한 생각대로 구현이 안 되는 점도 사전에 숙지한 뒤 제작에 들어간다. 일주일 정도면 옷은 거뜬히 완성된다.

한국에 사는 미국 친구도 개인적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편집숍을 운영한 경험이 있고, 또 옷을 워낙 좋아하기에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들을 변형해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게 재밌다고 한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데도 혼자 동대문에 가서 손짓으로 척척 잘도 원단을 사온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렇게 빨리, 그리고 쉽게 옷을 만들 수 있어 참 좋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살짝 걱정도 됐다. 왜냐하면 나는 동대문에만 가면 이상스레 긴장이 되기 때문이다. 학생 때 나와 친구들은 동대문에서 스와치(원단 샘플)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곤 했다.

도매 점포에서는 일반 손님에게 한 마씩 끊어서 팔지 않기에 도매 점포에서 적은 수량의 원단을 구입하는 방법은 거짓말밖에 없었다. 아니, 그때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표정연기를 가미해 무심한 척 “이거 샘플로 몇 마만 주세요” 하면 아저씨는 으레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사실 고정적인 거래를 해왔던 업체면 아무 이름이나 대다가 정체가 들통 날 수 있지만, 한국에 모래알처럼 많은 게 의류 브랜드인지라 대충 “어디요”라고 하면 사장님들은 슥 하고 원단을 잘라줬다. 그래서 옷 만드는 게 너무 쉽고 재밌다는 이 천진난만한 친구에게, 원단이 너무 비싸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사라고 쓸데없는 걱정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있는다고 누가 코를 베어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던 와중 얼마 전 한 사장님이 하신 말씀이 마음에 깊숙이 남았다. 시장에서는 “믿고 사라”는 것이었다. 사장님은 사실 소비자 입장에서 흥정하지 않아도 크게 손해 볼 일은 없다고 말씀하셨다. 상인들이 몇만원, 혹은 몇십만원 떼먹어서 부자 되려는 사람들도 아니고 다들 열심히 일해서 자식 공부시키는 사람들이니 그냥 믿고 사라고 말이다.

사장님은 조금 비싸게 사지 않았을까 찜찜한 마음, ‘시장’에 대해 소비자의 불신이 아직 남아 있는 걸 아쉬워하셨다. 하지만 시장은 동대문에 대한 선입견이 없던 외국인 친구에게 무척이나 관대한 곳이었다. 자신이 직접 만든 옷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키울 수 있는 기회, 그 첫 관문은 애초부터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었다.

남현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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