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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12.10 20:51 수정 : 2014.12.11 10:26

사진 남현지 제공

[매거진 esc] 시계태엽 패션

딱 1년 전 이맘때였다. 나는 모 남성잡지의 패션 어시스턴트로 한창 일하고 있었다. 연말인지라 이것저것 행사가 많은 시기였는데, 마침 연례 바자회에 투입됐다. (당시에는 넓디넓어 보였던) 가판대를 앞에 두고 한창 인기 있던 브랜드들의 안경과 머플러, 액세서리 등의 판매를 맡았다.

아르바이트는 꽤 해봤지만, 그때만큼 폭풍이 몰아친 듯 일했던 때도 없었다. 수십, 아니 족히 수백명은 넘는 사람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그 자리에서 바로 재고와 판매 확인을 해야 해서 앉았다 일어섰다 왔다갔다 난리도 아니었다. 행사가 끝난 뒤 남은 제품들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에디터 선배가 “혹시 저거 네가 그런 거니?”라며 벽 쪽을 가리켰다. 갤러리의 흰 벽이 온통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민망하게 엉덩이 부분이 부리나케 스쳐 지나간 부분, 즉 좌우로 왔다갔다한 수평선과, 바닥에 앉았을 때 내려간 수직선. 민망하게 청바지로 이름을 쓴 거나 다름이 없었다. 청바지에서 그렇게 물이 빠질지 몰랐다. 어시스턴트 생활을 통틀어 그날 가장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날 입고 간 바지는 내가 처음으로 산 ‘생지 데님’이었다.

생지(生地) 데님(사진)은 말 그대로 날것의, ‘생’청바지다. 영어로는 ‘로 데님’(Raw Denim)이라 한다. 가공이나 워싱을 거치지 않은 청바지다. 원단은 면직물에 인디고 염색을 한 것인데, 가공을 거치지 않았기에 물이 쉽게 빠지기도 한다. 생지 데님은 6개월에서 1년 정도 세탁하지 않고, 되도록 오래 입으라는 점원의 말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줄은 몰랐다. 조금 더 좋은 원단은 물이 덜 빠진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물이 완전히 안 빠질 수 없단다.

생지 데님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워싱’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완전무결한 생지 데님은 태어남과 동시에 비완전한 워싱의 세계를 향해 가는 것이랄까. 생지 데님 워싱 방법은 그만큼 각양각색이다. 우선 가장 보통의 방법. 원단이 접히는 순간 주름이 지므로, 기다란 욕조에 미지근한 물을 받은 뒤 바지를 뒤집어 담근다. 혹은 약간의 울샴푸를 푼다. 이 방법은 세제를 쓰지 않아 바지의 색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생지 데님의 빳빳함을 유지해주는 풀 성분이 제거돼 신축성이 더 좋아진다. 말릴 때는 건조대에 접어 널지 말고 집게로 집어 쫙 펴서 너는 것이 좋다고 한다.

얼마 전 리바이스 시이오(CEO) 칩 버그는 “청바지를 세탁하지 말라”는 조언으로 화제에 오른 바 있다. 실제로 그 또한 1년여간 청바지를 빨지 않았다고 한다. 세탁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물을 아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청바지의 내구성도 더 좋아지기 때문이란다. 버그는 “이 방식이 역겹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이제까지 어떠한 피부병도 걸리지 않았다”고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정말 온종일 밖에서 입은 청바지가 건강에는 해롭지 않을까? 신기하게도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례가 있다. 앨버타 대학교 의학생-교수 연구팀이 15개월 동안 생지 데님을 입은 결과 어떤 질환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해 ‘생지 대란’을 겪은 뒤 나의 청바지는 ‘세탁’과 ‘유지’의 기로에 서 있다. 어느 쪽이 건강에 해롭지도 않으니 순전히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할 것인가 혹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선택의 괴로움이 이토록 길었던 적도 없었다.

남현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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