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1.07 20:47
수정 : 2015.01.0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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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유니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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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시계태엽 패션
계절이 바뀌면 으레 의식처럼 하는 행위가 있다. 바로 서울에 있는 패션매장 순례하기다. 옷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루에 수십곳의 상점을 돌며 이것저것 눈에 쑤셔 넣는 일은 고역일 테지만, 옷 구경이 먹는 것보다 좋은 사람에게는 이만한 재미도 없다. 백화점 명품매장부터 개인이 운영하는 편집매장까지, 어떤 브랜드를 가져다 놓았고 또 배치는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터넷에도 비슷한 제품들이 있지만 사람들이 오고 가는 특정한 공간에서 보는 제품은 구매 그 이상의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청담, 압구정, 도산공원, 신사동까지 웬만한 러닝코스 못지않은 경로를 소화하고 마지막으로 당도한 곳은 방배동의 ‘팩랫 스토어’. 한적한 주택가에 덩그러니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날 가장 오래 머문, 그리고 주머니를 연 매장이 되었다.
‘팩랫’(pack rat)은 ‘숲 쥐’를 뜻하며 이 쥐의 특이한 습성처럼 별로 필요도 없는 것들을 모으는 수집광을 말한다. 말 그대로 팩랫 스토어는 주인이 이것저것 갖다 놓은 물건들의 모음이라는 데 존재의 의미가 있다. 다만 이 잡동사니들은 판매할 수 있는 새것인데다 위트로 가득 차 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fucked forever’(한국어로는 ‘영원히 ×됐어’·사진)라는 다소 과격한 문구가 새겨진 흰색 스니커즈였다. 디자인은 신발 브랜드 반스(Vans)의 인기 모델 ‘어센틱’(authentic)과 똑같았다. 언뜻 보면 흰색 실내화 같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이다. 하지만 캔버스천이 아닌 스웨이드에 한땀 한땀 정성 어리게 자수가 놓인 ‘욕설’은 평범한 흰색 운동화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했다. 고상하고 젠체하는 매장, 손님도 문에 들어서자마자 고개가 빳빳해지는 곳을 돌아다닌 터라 한줄기 유머에 목이 말랐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신발 디자인의 모태가 된 어센틱은 한없이 단순해 보이지만 그 탄생 배경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교를 중퇴한 ‘폴 밴 도런’은 신발가게에서 일하다 자신의 브랜드 ‘반스’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40여년 전 처음 가게를 연 날 아침, 폴은 12명의 고객에게서 주문을 받았다. 하지만 미리 만들어 놓은 신발이 없어 낮 동안 신발을 제작해 그날 오후에 손님을 불러 제품을 팔았다고 한다. 이때 처음으로 제작한 신발이 어센틱이다. 그날의 배짱이 브랜드의 원동력이 되었는지 이후 반스는 ‘도그타운 제트보이즈’(Dogtown Z-boys·뒷골목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반항적인 10대)의 필수품이 되었다. 어센틱은 ‘덱 슈즈’(deck shoes)라고도 불리는데, 특유한 고무밑창 ‘와플솔’(wafflesole, 와플 모양의 격자무늬 밑창)의 표면 접착력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데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이 유래 깊은 디자인의 신발에 과감함을 더한 건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하는 브랜드 ‘유니프’(UNIF)다. 유니프의 디자인은 반체제적이고 저항적이며 과격하다. ‘죽어’(DIE)라는 단어가 대문짝만하게 코트에 쓰여 있는가 하면, ‘(신이 아닌) 지루함에 기도하라’ 등 재미없는 옷은 죽어도 못 만들겠다는 어떤 탄탄한 심보가 느껴진다.
이런 브랜드를 손님에게 소개하고 또 아무렇지 않게 “얘네들 웃기는 애들이에요. 하하”라고 말하는 가게 주인의 손가락에는 ‘pack rat’의 알파벳이 한 글자씩 새겨져 있었다. 재미와 유머는 패션에서 ‘별로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다. 허를 찌르듯 담대하고 뻔뻔해야 한다. 그래야 무뚝뚝함으로 가득 찬 패션계에서 반스와 유니프처럼 우뚝 솟을 수 있다.
남현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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