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1.28 20:34
수정 : 2015.01.2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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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스웨트 셔츠. 사진 남현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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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시계태엽 패션
오랜만에 고향집에 들렀었다. 몇 달에 한번 갈까 말까 하니 자연스레 입고 걸치는 것도 매번 다를 수밖에 없다. 엄마든 동생이든 내가 잘 지냈나보다 얘가 어떤 행색을 하고 왔느냐에 집중한다. 엄마와 동생은 각자의 관점에서 나의 모습을 스캔한다. 우선 엄마는 내가 서울에서 변변찮게 입고 다니는 건 아닌지, 혹은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을 무리해서 사 입는 건 아닌지 훑어본다. 동생은 서울에서 요새 인기 있는 브랜드나 제품은 무엇인지, 자기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브랜드를 서울에 입고 가면 창피하지는 않을지가 최대 관심사다. 어쨌든 현관에서 그렇게 1차적인 스캔을 마치고 나면, 꼬치꼬치 캐묻는 2차 심층 스캔이 시작된다. 선제공격은 남동생. “누나, 지금 입고 있는 거 챔피언 아님?” “응.” “그거 시장메이커 아이가? 서울에는 요새 그게 유행이가?” “(…)”
마음 같아서는 “야! 이 옷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고 그런 브랜드가 아니라고! 챔피언(Champion)은 ‘유행’하는 브랜드가 아니라, 1919 미국 로체스터에서 탄생한 스포츠 캐주얼 브랜드로 100년이 넘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현재까지도 그 위상을 떨치고 있다고! 내가 입고 있는 스웨트 셔츠(사진)는 1934년 챔피언이 개발한 ‘리버스 위브’(reverse weave) 기법, 즉 수직으로 직조한 면 원단을 가로로 사용해 세탁 때 수축하는 걸 막는 획기적인 기술로 만들어졌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이 옷을 입는 당위성을 상세히 말하면 패션에 한창 관심 있는 동생에게 빼앗길 것이 분명하니 “시장 메이커는 아닌데… 그냥 샀어”라고 얼버무렸다.
그냥 사긴 뭘 그냥 사. 사진의 챔피언 스웨트 셔츠는 일본 하라주쿠의 패션 거리 ‘캣스트리트’의 챔피언 매장에서 샀다. 요즘은 국내 쇼핑몰에서도 챔피언 제품을 쉽게 구입할 수 있지만, 챔피언 직영 매장이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사는 것보다 그 종류가 다양하진 않다. 귀신에 홀린 듯, 색깔만 다른 같은 디자인의 제품을 계산대 위에 올리고 또 살 게 없나 두리번거렸다.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을까.
챔피언이 오랫동안 질 좋은 캐주얼 웨어를 만들어서도, 군사규격 밀스펙(MILSPEC)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 미군병사에게 납품되어서도, 미국 프로농구 리그(NBA)의 공식 유니폼으로 채택됐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단순히 패셔너블해 보였기 때문이다. 시작은 ‘패셔너블한 남친 스타일’의 정석을 만든 일본 잡지 <뽀빠이>(Popeye)의 화보였다. 귀여운 소년이 걸치고 나오는 챔피언 스웨트 셔츠, 트레이닝 팬츠, 후드 등은 흰색 양말, 더플코트 등의 아이템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화보에 같이 등장하는 소녀처럼, 나도 무심하게 챔피언을 입으면 귀여운 소녀가 될 것 같았다. 세개를 사면 세배로 귀여워질 것 같았나보다.
하지만 단지 챔피언은 귀여워 보이는 소년 소녀들의 일상복이 된 건 아니다. 스트리트 브랜드인 스투시(Stussy), 슈프림(Supreme), 우드우드(WoodWood), 아메리칸 캐주얼 브랜드 토드 스나이더(Todd Snyder), 어반 아웃피터스(Urban Outfitters)와의 협업(컬래버레이션)으로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이며 브랜드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 컬래버레이션한 브랜드들은 챔피언의 진정성 있는 역사와 품질을, 챔피언은 패션의 최전선에 있는 브랜드들의 감성을 흡수한다. 오래된 브랜드가 살아남는 가장 유효한 방법, 챔피언에서 찾으면 된다. 같은 옷을 세개나 집었다니까.
남현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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