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4.22 20:41
수정 : 2015.04.23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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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고바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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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시계태엽 패션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집은 좁은데 소비는 계속되고 집 밖으로 나가는 건 없으니, 티끌 같은 추억마저도 끌어안고 사는 셈이다. 본가에서 독립한 지 6년째, 지금의 집에는 학창 시절 입던 옷들도 더러 있다. 사진의 국방색 카고바지도 그중 하나다. 2000년대 중반 인터넷에서는 ‘직수입’ 열풍이 불었고 아베크롬비, 홀리스터, 어반 아웃피터스 등 미국발 캐주얼 의류는 옷 좀 입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언의 약속 같은 존재였다. 다리 세 개는 족히 들어갈 넓은 통의 카고바지도 빼놓을 수 없는 유행 아이템. 그 시발점은 아무래도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아닐까 한다. 지금이야 ‘해외 패션피플’이라고 검색하면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튀어나오지만 당시에는 베컴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카고바지에 플립플롭(쉬운 말로 ‘쪼리’), 골지 니트 비니.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조합이지만, 길거리엔 베컴의 일상 스타일을 따라 하는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카고바지(사진)는 밀리터리 패션의 기본 아이템인 만큼 군복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카고바지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컴뱃 팬츠’(combat pants). 즉 전투용 바지다. ‘카고’라는 이름이 붙은 건 양옆, 앞뒤로 달린 큼지막한 주머니 때문이다. 이전의 군복에도 주머니는 있었지만 자루 형태의 주머니를 추가로 달게 된 건 20세기 들어서다. 군인들은 새로 추가된 주머니에 야전붕대, 지도, 예비 탄약, 라디오 등을 수납했다. 카고바지가 다른 옷보다 튼튼한 조직의 원단으로 만들어진 것도 군복에 주로 쓰이는 두꺼운 카키색 서지(능직) 원단을 계승한 것이다. 편안함과 기능성을 내세운 군복은 전쟁이 끝난 뒤 평상복으로 흡수되었다. 카고바지 또한 다양한 스타일로 변주되며 수십년간 캐주얼 패션에 기여했다.
사진의 바지는 카고바지의 본연에 충실함을 보여준다. 끝을 모르고 쑥 들어가는 깊은 앞주머니, 미니 아이패드 정도는 들어갈 큼지막한 옆주머니, 앉을 때마다 그 존재가 느껴지는 덮개 주머니(플립 포켓), 황동색 버튼, 허릿단을 조절할 수 있는 끈까지 있을 건 다 있다. 브랜드의 이름은 ‘더 오리지널 카고 아메리칸 아웃피터스’. 당시 유행하던 브랜드의 유사상품이었는지 지금은 판매하는 곳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난 10년간 카고바지가 완전히 자취를 감췄던 건 아니다. 통은 좁아졌으며 불룩한 주머니는 작고 슬림해졌다. 덤불을 헤쳐나갈 것 같은 터프함보다는 말쑥하고 점잖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구식의 카고바지에 눈길이 가는 건 다름 아닌 복고 열풍 때문이다. 통이 넓은 카고바지와 동시대에 유행했던 나이키 흰색 에어포스, 아디다스 슈퍼스타는 ‘놈코어’(평범함을 추구하는 패션)라는 세련된 이름을 달고 다시 거리에 등장했다. 밑단이 질질 끌리는 넓은 통의 바지도, 심지어 나팔바지도 ‘부츠컷 바지’보다는 ‘벨보텀 팬츠’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트렌드의 반열에 올라섰다. 카고바지라고 유행의 주역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밀리터리 패션은 매번 런웨이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니까. ‘뉴웨이브 밀리터리’ 같은 근사한(혹은 모호해서 있어 보이는) 이름은 어떨까? 누가 더 큰 주머니를 달았나 경쟁하는 시절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남현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에디터, 사진 남현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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