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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g Jungsoo, English Editor of the Hankyor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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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지난 5일 인도의 하이데라비드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 연차총회에서는 아시아의 경제통합에 전기가 될 수 있는 합의가 이뤄졌다. 한국과 중국, 일본 세나라의 재무장관들이 ‘아시아 공동통화’(아쿠, ACU)의 연구를 시작하기로 뜻을 모은 것이다. 이와 별도로 개최된 아세안+3 재무장관 회담에서도 동일한 합의에 이르렀으며 아시아 지역의 금융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아시아 통화기금’의 설립도 검토키로 했다.물론 이 합의는 극히 원칙적인 수준의 내용인데다 아쿠도 유로화처럼 단일통화가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의 통화가치를 가중평균한 단위 지수에 불과하다. 본격적인 아시아 경제통합의 수순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아시아 경제의 핵심축인 한·중·일 3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 전체가 통화 통합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앞으로 세계경제에 적지 않은 파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합의는 한·중·일 3국이 가치가 폭락하고 있는 달러화를 앞으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는 비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쿠 합의에는 일본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 및 중국과의 관계가 최악의 국면에 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동아시아 경제통합의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뜻밖이다. 지금까지 일본은 독도 문제를 비롯해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등 동아시아 국가들을 철저히 외면하거나 자국 이익만을 고집하는 태도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현재도 일본은 이런 도발적 기조를 바꿀 기미가 없다. 오히려 일본은 12일 독도를 한국 정부가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주장을 정부의 공식 태도로 정리했다.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의사표시인 셈이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최대의 걸림돌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은 기존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일본의 이런 자세는 미국과의 동맹관계 강화에 올인 했던 기존의 외교기조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일본의 자기모순이 나타난다. 한국과 중국 등 주요 동아시아 국가들을 자극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제통합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관계에서 정경 분리의 원칙이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일본의 도발적 행동은 상대방 국가의 자존심을 유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군비 증강을 통한 실질적인 위협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통합의 중대한 걸림돌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최근 가속화하는 달러화의 가치 하락은 미국발 세계 불황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대미 수출에 크게 의존해온 한·중·일 세 나라에도 큰 타격을 줄 것이다. 동아시아의 내수 확대가 완충장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한·중·일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내수 시장을 찾기 힘들다. 아시아 통화기구와 아시아 공동 통화의 모색은 미국 달러 지배체제의 붕괴 내지 약화 가능성에 대한 자구책적 성격을 띠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미국 재무부 채권 매입에 사용하는 대신 동아시아의 내수 확대를 위한 투자에 투입할 경우 미국 재무부 채권의 매입 규모는 자연히 감축될 수밖에 없다. 이는 천문학적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는 미국 경제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다. 아시아 공동통화 모색에 미국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제동을 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수 차례 동아시아의 독자적 통화통합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았다. 미국은 1980년대 일본의 엔화 국제화 계획도 압력을 가해 무산시켰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도 일본은 자국 주도로 아시아통화기금을 출범시켜 지원하려고 했지만 미국의 반대로 좌절했다.
아시아 통화 구상이 순항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발적 외교기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 문제는 일본의 자가당착적인 의식구조에 있다. 한편으로 미국 일변도 외교노선을 펼치면서 경제면에서는 미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등 자기모순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부상에 위협을 느끼는 일본은 군사력 증강과 미국과의 동맹강화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 왔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도발적 태도는 긴장을 의도적으로 고조시킴으로써 방위력 증강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 납치문제를 필요 이상으로 확대시키면서 대북한 적대 기조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의 양다리 걸치기 외교는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과 동아시아 국가들로부터 모두 배척당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1971년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중국 외교부장과 비밀회담을 하면서 일본의 편협성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중국은 보편적 세계관을 갖고 있지만 일본은 부족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이듬해 미국과 중국은 일본을 따돌리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을 통해 역사적인 데탕트를 실현했다.
장정수 논설위원 jsj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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