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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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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와일드 번치〉 〈겟어웨이〉 등의 샘 페킨파(1925~84)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 우위선(오우삼) 등 전 세계 후배 감독들이 칭송하는 거장이다. 지난 3월부터 6월 초까지 서울시네마테크와 부산시네마테크를 오가며 세차례 샘 페킨파 회고전이 열렸다. 〈킬리만자로〉의 오승욱 감독을 최근에 우연히 만났는데, 그 역시 페킨파 감독의 열렬한 팬이다. 오 감독은 페킨파의 최고 영화로 72년작 〈관계의 종말〉을 꼽으면서 “페킨파의 최고작이 〈가르시아〉라고 주장해 온 박찬욱 감독이 최근 회고전에서 〈관계의 종말〉을 보고 이 영화로 바꿨다”는 말까지 전했다. 6~7년쯤 전에 비디오로 〈관계의 종말〉을 봤던 나 역시 그때의 감명을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그 감명은 소문난 영화 애호가인 오 감독, 박 감독과 조금 다를 듯했다. 내가 이 영화를 잊지 못하는 건, 영화적 완성도보다 이 영화가 말하는 세상의 법칙이 97년 말 구제금융 이후의 한국 사회를 읽는 데 유효하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미국 서부의 격변기, 다시 말해 서부극의 배경이 돼 온 ‘무법’ 서부 시대의 종말기를 그린 것이다. 메시지를 앞세우지 않고 한 편의 시처럼 흘러가지만, 거기서 내가 읽은 바를 요약하면 이렇다. 개척기 서부의 실제 권력자는 목장 주인과 그 수하의 총잡이 마을 청년들이었다. 종종 이들의 사적인 폭력이 판결을 대신했고, 그건 불법이지만 또한 관습적 질서이기도 했다. 개척기가 지나자 연방정부는 은행과 철도, 연방 보안관을 앞세워 과거 서부의 질서를 몰아내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형식은 합법적일지언정 내용은 옛 질서보다 더 폭력적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질서는 옛 질서와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으며, 다만 폭력적인 교체기에 새 질서에 재빨리 편승한 총잡이가, 나머지 총잡이들을 죽이고 살아남을 뿐이다. …. 구제금융 전후의 한국에 대입해보자. 구제금융 이전에 한국 경제의 권력자는 재벌과, 거기에 유착한 관료·정치인이었다. 비자금을 조성해 정치자금과 뇌물로 쓰고, 그 대가로 은행 대출 등 각종 지원이 뒤따랐던 건 불법이지만 암암리에 이뤄져온 관행이기도 했다. 외환위기로 들이닥친 새 질서는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세웠다. 거기엔 옛 관행의 일소에 더해, 노동시장 유연화까지 포함돼 있었다. 옛 질서 권력층뿐 아니라 일반 노동자들까지도 새 질서의 법정에 불려나갔지만 노조는 저항하지 못했다. 새 질서엔 정경유착과 재벌의 문어발식 기업 지배를 깬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노조는 무기력해졌고, 해고도 쉬워지고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있다. 반면, 정경 유착과 재벌의 변칙적 기업 소유 등 ‘옛 권력자’ 쪽의 관행은 어떨까. 2002년 대선 자금, 현대차, 외환은행 매각 등에 대한 일련의 검찰 수사에 비추어볼 때 그 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지금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또다른 ‘새질서’를 끌어들이려 한다. 이번에 내세우는 ‘국제기준’에는 ‘경쟁력이 취약한 산업 부문에 대한 보호장치의 제거’가 포함돼 또다른 희생양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협정저지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는 등 구제금융 때와 달리 저항이 만만찮다. 한번 겪어 봤으니 당연한 일 아닐까. (지난 2월 열린 베를린 국제영화제는 〈관계의 종말〉 특별판을 폐막작으로 상영했다. 이 영화가 미국식 세계화를 두고 시사하는 바가 있음을, 베를린 영화제도 눈여겨 본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억지일까?) 임범 대중문화팀장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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