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7.04 19:20
수정 : 2006.07.0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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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승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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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다닐 적 일이다. 오전 수업시간에 도시락을 몰래 꺼내먹다 들키고 말았다. 몇차례 귀싸대기로 끝나길 바랬지만 그날은 운이 따르지 않았다. 악명높은 ‘고문 기술자’를 만났으니. 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입에는 총각김치를 물고 선 채 복도에서 거의 반나절을 보내야 했다. 손가락에 쥐가 날 것 같은 지경이 돼서야 고통은 끝났다.
지금도 중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고문 기술자’로 불리던 사회 선생님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다들 한두차례 당한 경험을 약간의 허풍까지 곁들여가며 쏟아낸다. 교사의 체벌은 이런 것이었다. 물을 묻힌 슬리퍼로 뺨 때리기, 원산폭격하고 앞으로 전진하기, 손가락 사이에 막대기 넣고 짓누르기 등등. 고문 기술은 잔인했고 고통 또한 컸지만 뒤끝(상처)을 남기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피해자들은 고작 연습장에 선생의 얼굴을 그려놓고 볼펜심을 던져 꽂는 정도의 복수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공포, 모욕감을 느꼈을 터이지만, 친구들은 ‘그래도 의리와 정이 있었다’며 몇 해 전 돌아가신 선생님을 제일 그리워한다.
갑작스레 ‘체벌의 추억’을 거론하는 건, 얼마 전 담임교사가 초등학교 1학년생의 여린 뺨을 때린 사건 때문이다. 아직도 체벌을 학습의 일부라 여기거나 체벌과 폭력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현실은 착잡하고 섬뜩했다. ‘애들은 맞으면서 큰다’는 억압사회의 씁쓸한 잔재 탓에 학교에서의 크고 작은 폭력이 묵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물리적 체벌에 대한 비난 여론이 잠시 들끓다 사라진 것도 유난히 폭력에 관대한 우리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따라서 교사 폭력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불과 한 달 전엔 ‘무릎 꿇은 교사’가 문제가 됐다. 스승에게 대드는 학생까지 거론하며 교권 추락을 걱정하지 않았던가.
누가 피해자고 가해자냐에 따라 대안도 천양지차다. 교권이 문제될 땐 아이들을 더 엄하게 다루어야 한다며 미국식 ‘불관용 정책’이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학부모 단체들은 앞다퉈 ‘사랑의 매’를 학교에 전달하기도 한다. 반대로 교사 폭력이 불거지면, 부적격 교사를 걸러내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그제야 학생 인권법에 눈을 돌린다.
장군 멍군처럼 반복되는 학교 주체들간의 갈등은 폭력이라는 한 뿌리에서 비롯된다. 피해자가 교사든 학생이든, 아니면 학부모든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본질적인 인권을 침해받는 데서 문제는 불거진다.
교사의 손찌검과 폭언은 어떤 교육적 목표를 내세우더라도 용납될 수 없는 물리적 폭력이다. 마찬가지로 급식 지도 방식에 항의한다며 교사를 윽박지른 행위는 교권침해 이전에 명백한 명예훼손이자 인권 침해다. 얼마 전 무더기 출교 사태를 빚은 고려대생의 감금·폭력 행위도 엄밀히 보면 자신들의 억울한 소명조차 들어주지 않았다는 모욕감, 일종의 정신적 폭력의 피해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체벌의 고통조차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하는 기성세대의 독특한 심리구조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학창시절을 온통 억압적인 규율과 공포로 가득찬 어두운 기억으로 채울 순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자라나는 아이들한테까지 고통스런 체벌을 교육에 대한 교사의 열정이나 사랑의 매로 오도하는 일만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미 아이들은 사랑의 매를 ‘뼛속 깊이 스며드는 사랑’이라고 비아냥대지 않는가. 교육 주체들이 인권을 침해하는 일상적인 폭력에 조금만 더 민감해진다면 교실 붕괴 우려도 크게 잦아들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나 교사에게 반항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잘못된 훈육 방법에 저항하는 것일 뿐이다.”(토머스 고든)
김회승/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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