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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09 20:35 수정 : 2006.07.09 20:35

신기섭 논설위원

아침햇발

말이 거칠어지는 건 한 사회가 병들어 가는 징조라고 생각한다. 글쟁이들의 언어가 거칠어지는 것은 특히 그렇다. 강준만 교수가 실명 비판의 영역을 개척한 이후 이른바 ‘논객’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하면서 전투적 또는 폭력적 글쓰기가 몇년 동안 난무했다. 강 교수의 철저하고 치밀한 자료 축적과 분석은 외면한 채 직설적 표현만 극대화시킨 이런 글쓰기는 즉흥적이고 변덕스런 사회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런 사회상을 더욱 부추겼다.

그러나 더 슬픈 건 글이 사라지는 일이다. 인터넷과 몇몇 매체를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전투적 논객들은 지난번 대선을 고비로 하나둘 사라졌다.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사회적 담론을 이끌던 비평지들 또한 지난해 〈당대비평〉의 발행 중단을 끝으로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얼마 전 한 유명 논객의 절필 선언은 1990년대 말부터 이어지던 ‘담론의 시대’가 진정 끝났음을 알리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너무 조급하게 현실과 맞서거나 거꾸로 현실과 긴장관계를 잃은 글쓰기 또는 담론의 생명력은 원래 딱 그만큼 아니겠는가 싶다. 이는 개혁세력 그리고 이들과는 일정하게 맞서온 진보세력 모두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생긴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담론은 등장하지 않은 가운데 요즘은 자극적인 말들만 무성하다. 특히 거슬리는 것이 내부자 고발쯤으로 치장된 폭로성 비판들이다. 전교조 출신으로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이의 전교조 공격이 딱 그 꼴이다. ‘진보적인’ 학자 출신인 전 노동부 장관의 민주노총 공격, 이에 맞서다가 뒤늦게 그 대열에 합류한 한국노총 위원장의 공격과 묘하게 연결되는 느낌이다.

전투적 글쓰기는 상대 걱정 하는 척하진 않았다. 목표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폭력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요즘 극성을 부리는 우익들에게 고스란히 전염됐고, 그래서 개혁세력이 당하는 건 자업자득일 수도 있다. 반면에 폭로성 비판들은 대결 자체를 은폐함으로써, 그리고 ‘우물에 독 타기’ 식으로 상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얻으려 한다. 교육부는 전교조와 단체교섭을 벌이는 사용자이니, 청와대 비서관도 사용자나 진배없다. 얼마 전까지 사용자 처지였던 이의 공격은 결코 ‘고뇌에 찬 내부 비판’으로 치장될 수 없다. 진심에서 나온 이야기냐, 얼마나 맞는 이야기냐는 부차적이다. 문제는 비판자의 객관적 위치다.

이런 종류의 공격이 거슬리는 건, 공격 받는 쪽에 끼칠 악영향 때문이다. 폭력적 글쓰기가 더욱 폭력적인 역공을 촉발했듯이, 전교조가 맞대응에만 몰두하면 어쩌나 싶다. 사실 지금처럼 집중 공격을 당하는 와중엔 내부 문제를 진지하게 돌아볼 여유가 생기기 어렵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 부작용은 고스란히 전교조 조합원들 자신,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더 걱정스러운 건 민주노조 운동의 정당성을 거부하는 어떤 장기적인 흐름이다. 민주노총에 대한 공격은 이제 식상할 지경이고 지금은 초점이 전교조에 모아지고 있을 뿐이다. 이 흐름은 민주노조 운동 전반의 앞날을 걸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한 발쯤은 더뎌 보일지라도 겉모습이 아니라 진짜 현실과 맞서는 긴장감, 그리고 긴장감을 잃지 않는 사유와 담론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과 노동 정책,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응하는 게 당장 시급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을 키우는 일도 게을리할 수 없다. 이 일은 대체로 운동과 유기적으로 결합한 비판적 지식인의 몫이었지만, 지식인의 실종을 탓하기만 할 건 아니다.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자계급에서 나와야 하는 법이다. 지금부터라도 이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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