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03 18:33
수정 : 2006.08.0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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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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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좀 과장되게 말하면 영화 〈한반도〉와 〈괴물〉은 이땅의 두 마리 괴물 같다.
이 둘은 한국 상업영화에서 처음으로 ‘반(半)식민성’이라는 문제를 도마에 올렸다. ‘한반도’는 일본을 과녁 삼아 감정적 민족주의에 호소하다가, 친일과 반일의 대립을 한국의 생존전략에 대한 견해 차이로 격상시키면서 반식민성의 문제를 화두로 끌어안고 고민한다. ‘괴물’은 첫 장면에서 미8군 용산기지 영안실의 더글러스 부소장이 독극물을 하수구에 버리라고 지시한다. 지문에 나오는 ‘2000년 2월9일’은 당시 주한미군 영안소 부소장 맥팔랜드의 명령으로 독극물이 한강에 무단방류된 바로 그날이다. 이 독극물을 먹고 괴물이 자란다.
그런데 이 두 영화를 수백만명이 보면서도 영화의 정치적 발언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에는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친일수구파와 동일시하는 대목이 여러차례 나온다. 당연히 그런 쪽(예컨대 한나라당)에서 반발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반응이 없다. ‘괴물’도 다르지 않다. 미군의 불법행위로 탄생한 괴물을 빌미삼아, 미군은 한강을 세균전 프로그램의 실험장으로 삼으려 하고, 한국 정부는 여기에 속수무책이다. ‘과장된(혹은 허황된) 묘사로 반미감정을 부추긴다’는 비난이 보수언론에서 나올 법한데 ‘영화 잘 만들었다’는 찬사만 실린다.
일반인도 마찬가지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7일 발행될 〈씨네21〉 565호에 보내온 ‘괴물’의 평을 미리 훔쳐봤다. 거기서, 정씨가 인터넷에 올라온 수많은 평을 봤더니 그 글들은 “거의 일제히 일정 부분을 이 영화가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데 할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씨는 “‘괴물’은 그것(정치적인 견해의 표출)이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보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일까? 그런데 그게 왜 부끄러운가?”고 반문한다.(정씨의 평은 원고지 153장의 장문으로, 이 영화가 정치적이며 정치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를 무척 흥미롭게 분석한다. 강추!)
반식민성이라는 예민한 문제를 정면으로 드러내는데, 관객들은 거기에 무심해하는 듯한 모습이 이 두 영화를 괴물스럽게 보이게 한다. 왜 그럴까? 영화의 발언에 새로운 점이 없어서? 반식민성이라는 게 모두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어쩌지도 못하는 문제여서? 어떻게 추리해 보든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 영화도 관객도 무기력해 보인다는 점이다. 강우석 감독은 어떨 때는 사안을 위험할 정도로 단순화해서 한쪽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그 힘이 강점이었는데 ‘한반도’에서 반식민성과 마주쳐서는 이쪽저쪽을 고루 살피면서 무기력해졌다. 봉준호 감독은 단순화하기보다 복잡하게 꼬여 있는 사안의 아이러니를 들춘다. 그에게 한국은 이미 반식민성 앞에 무기력한 사회다. ‘괴물’에서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는 무기력하고, 사회를 바꿀 주체가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두 영화에 담긴 무기력함은 바로 한국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가장 민주적이길 기대했던 참여정부가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게 불과 몇 해 전 일이다. 무기력감의 내면화를 피해갈 재간이 없음을, 이 두 영화는 의도했든 않았든 드러내고 말았다. 아쉬울지 모르지만 이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일 아닐까. 한국 영화는 커 가는 스케일의 요구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이야기의 무대를 넓혀야 할 것이고, 그러려면 반식민성 문제와 계속 부닥칠 수밖에 없다. 반식민성을 다룬 최초의 영화 두 편이 모두 제작비 100억원대라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첫 만남은 썰렁해 보이지만 이제 시작이다.
임범 대중문화팀장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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