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9.24 18:09
수정 : 2006.09.2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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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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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1994년 초까지 석유류 값은 정부가 고시했다. 정부가 정유 5사의 평균 생산비용에다 일정한 이윤을 더해 값을 매기는 방식이었다. 정부가 허용한 이윤은 자기자본 대비 세후 10%였다. 정유사들은 이만큼만 남겼을까? 장부상으로는 그랬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가격고시제 적용 대상은 정유 부문만이었는데, 정유사들은 석유화학 부문의 비용도 상당 부분 정유 부문에 얹었다. 더러는 원유를 정제해서 나오는 석유류 중 고가품 비중을 줄여 보고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방법으로 비용을 부풀려 더 많은 이윤을 누렸다.
서울 은평 뉴타운 아파트 고분양가 파문이 커지자 서울시가 분양원가를 공개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과거 정유사들이 했던 ‘장난’을 떠올리게 한다. 원가에 포함시킨 땅값은 조성 원가가 아니라 감정가였고, 건축비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다. 민간 기업이 돈 때문에 ‘속임수’를 쓰는 것이야 자주 봐온 일이나, 지방정부까지 그런다면 참으로 고약하다. 서울시가 원가를 부풀린 게 사실이라면(개연성은 높다) 시민으로선 분통 터질 일이다. 정유사가 낸 원가 자료는 정부가 검증이라도 하지만, 서울시가 밝힌 분양원가는 검증할 곳도 현재로선 없다. 시민·사회단체들이 분양원가를 제대로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우기면 그만이다. 민간 건설업체가 분양가를 부풀리는 것도 참기 힘든데, 공공 부문까지 그러는 판이니 국민은 이제 기댈 언덕이 없다. 판교 새도시에서 이미 정부한테 한차례 배신감을 느낀 터여서 더욱 참담하리라.
집이 없거나(서울에 사는 가구 중 절반은 무주택자다), 집을 좀 넓혀 가려는 이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이제나저제나 집값이 잡히길 기다렸으나, 안정될 만하면 새로운 변수가 불거지며 집값이 다시 뛰는 일이 몇년간 되풀이됐다. 이번에는 정부와 서울시 등 공공 부문이 기름을 부었다. 후폭풍이 거세다. 이러다가 내집 마련 기회가 영영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고분양가 논란에도 불구하고 파주 운정 새도시 ‘한라비발디’ 아파트 청약에 사람들이 대거 몰린 게 반증한다. 아파트가 매력적이어서라기보다는 더 기다렸다간 이런 아파트마저도 잡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조급함이 배어 있다.
집값과 분양가가 치고받으며 오르는 악순환은 끊어야 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 부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나, 오히려 한 술 더 뜨고 있다. 집 짓는 게 공공주택 공급 정책의 전부가 아니다. 싼값에 집을 공급해 전반적인 집값 안정도 마땅히 도모해야 할 텐데, 그런 개념조차 읽히지 않는다. 공공주택 개발 취지보다, 그 결과 공무원들이 손 안에서 주무를 수 있는 돈뭉치가 얼마나 키워질지에 더 관심이 있는 모양새 아닌가.
아파트를 공급하는 쪽이 분양가를 얼마로 하든,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해야 하는 게 지금의 아파트 분양 시장이다. 독점적 시장 같은 실패한 시장이다. 소비자는 무력하고, 수용자일 뿐이다. 건설업체의 폭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분양가 인상 부채질 등에 집 없는 이들은 마치 토끼몰이 당하듯 궁지로 몰리고 있다.
소비자 개인은 약해도 힘을 합칠 수만 있으면 시장을 움직인다. 언제까지 참을 건가. 정부도 지자체도 믿을 게 못 되면 소비자가 움직일 수밖에 없다. 분양가를 턱없이 높여 폭리를 취하려는 곳에는 다 함께 청약을 거부하는 불매운동이라도 벌이지 못할 것 없다. 시민사회단체가 낙선운동을 펼쳤듯이…. 머지않아 청약에 들어갈 은평 뉴타운부터 대상으로 삼아 보면 어떨까.
김병수 논설위원
byung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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