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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12 20:52 수정 : 2006.10.12 21:41

임범 대중문화팀장

아침햇발

옆자리에 앉은 후배 기자가 오는 18일부터 평양에서 열리는 윤이상 음악제를 취재하기 위해 며칠 전 통일부의 방북자 교육까지 받았다. 그런데 북핵 사태로 이 음악제 중 남북 공동 행사가 취소돼 못 가게 됐다. 그 모습을 보면서 떠오른 사람이 하나 있다.

3년 전 이맘 때 남북 영화 교류 사업을 취재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평양에 머물던 4박5일의 체류기간 안내원들이 따라붙었다. 개방이 제한적이어서 이 안내원들과 함께, 이들이 안내하는 곳만 다닐 수 있었다. 함께 갔던 7명의 일행에겐, 북한의 한 단체에 소속된, 우리로 치면 공무원 세명이 동행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도 같이 하고 술도 함께 마시니 친해지지 않기도 힘들지만 그 셋 중 한 명이 유달리 친밀하게 다가왔다.

대학 친구 중 한명과 많이 닮아서였을까.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왔고, 희고 갸름한 도회풍의 미남이었다. 키도 큰데다, 과묵하고 생각이 많아보여서 나보다 한살 적었음에도 형처럼 느껴졌다. 평양의 식당이나 공공시설에 근무하는 여자들과도 친구처럼 얘기하길 좋아하는 듯했다. 나도 남자보다 여자들과 떠드는 걸 좋아하는 쪽이어서인지, 그런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호감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모양이다. 평양에서 그와 얘기를 많이 나눴다. 그런데 그 대화라는 게 참 묘했다. 정치 얘기는 알아서들 먼저 피했다. 상대방이 잘 모를 것 같거나, 괴리감을 유발할 것 같은 얘기도 피했다. 주로 풍습과 기호에 대해 말했고, 개인적인 견해나 경험은 상대방에게 묻기보다 스스로 먼저 얘기했던 것 같다. 거기서 뜻밖의 미학이 작동했다. 서로를 배려해 대화의 소재를 애써 제한하면서도 교감의 폭은 넓히고 싶어하는 마음이 읽힌다고 할까.

사소한 것들, 이를테면 ‘냉면의 맛은 어떤 데 있다’라거나 ‘술자리에서 말 많은 사람은 싫다’는 정도의 단순한 수준에서 공감대가 이뤄지면 그게 그렇게 반가왔다. 그가 바닷가에서 군복무할 때 전복, 오징어 등을 잡아먹었다는 얘길 들으면서 북한에선 낙지를 오징어로, 오징어를 낙지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함께 포켓볼을 치면서 공에 회전을 주는 타법, 우리가 ‘히네루’라고 부르는 걸 그들은 ‘히날’이라고 부르는 것도 알았다. 3, 4일째 됐을 땐 서로의 가족 얘기, 과거에 했던 연애 얘기도 조금씩 나눴던 것 같다. 누나만 셋이라는 그는, 어릴 때 아버지가 집에 왔을 때 누나 중 한명이라도 그를 업고 있지 않으면 난리가 났다고 했다. 그런 가부장적 분위기에서 자란 탓에 거꾸로 여자를 좋아하게(성적으로가 아니라 페미니즘적으로) 된 것 같다는 말을 그가 했는지, 내가 했는지, 아마도 내가 한 것 같다.

대화에 정치적 색채를 배제함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동지애가 생기는 이 기묘한 관계 또한 분단의 산물일 터. 그와 함께 서울의 내 단골집에서 소주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났을 땐 서러웠다. 같은 시대를 다른 공간, 다른 체제에서 지내온 40살 안팎의 삶을, 어떤 해석이나 따짐도 없이 그냥 들려주고 듣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떠올랐던 마지막 날과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그와 헤어질 때, 뭔가 뜨거운 것이 뱃속에서 목구멍으로 솓구쳐 올라왔다.

나는 부모님 고향도 남한이고, 대학 때 ‘학생운동’이라는 걸 할 때도 엔엘(민족해방) 계열은 아니었으며, 통일 문제에 대한 시각도 냉담한 쪽이다. 또 지금은 시절이 더 없이 어수선하다. 감정 과잉 같아 그 친구를 보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그를 만난다면 더 없이 반가울 것 같고, 서로 아주 중요한 일만 없다면 바로 소주 한잔 하러 달려갈 것 같다.

임범/대중문화팀장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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