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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 국내정치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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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사람들에게 뒤처질 수 있다는 두려움, 그걸 극복할 방법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되는 길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못한다. 나는 인생의 승자가 될거다. 근데 왜 이리 불안할까?” 얼마 전 <한겨레> 입사 지원자들의 2차 작문 시험을 채점했다. 주제어는 ‘새벽’이었다. 윗글은 한 수험생의 답안 맺음말이다. 이 수험생은 직장인이면서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새벽에 영어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사는 일상을 써내려갔다. 좋은 점수를 주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관심이 ‘나’에게만 집중돼 있었던 탓이 크다. “나는 인생의 승자가 될 거다”라는 말은 불편했다. 그 수험생의 글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근데 왜 이리 불안할까”라는 그의 ‘불안’이 더 가슴에 닿았다. 그는 새벽 횡단보도 앞에서 발을 헛디뎌 발목을 삐끗했다. 아무도 없는 컴컴한 겨울 새벽, 그는 ‘고립감에 눈물이 흘렀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 불안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불안’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없을 때,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사야 할 때가 불현듯 닥칠지 모른다는 압박 때문일 것이다.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억지로 계속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청구서를 제때 처리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해고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충분한 돈이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라고 했다. ‘두려움’, ‘불안’은 우리를 움직인다. 새벽 영어학원으로, 투잡스로, 성형외과로. ‘강한 자’가 되려 애쓰면서 우린 어느새 세상의 이종격투기 선수가 되어간다. 영혼은 점점 황폐해져 가는데, 사회는 이젠 ‘인격’까지 요구한다. 스페인이 중남미를 침공하던 때, 원주민들은 셋째아이를 낳으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백인들의 노예사냥을 피해 도망가려면 부부 한 사람이 한 아이씩 들쳐업고 뛰어야 했기 때문이다. 좀더 세련된 모습으로 바뀌었을 뿐,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작은 경제단위, 그리고 전투단위인 ‘가계’가 저출산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과 ‘노예의 불안’을 피하려 했던 그옛날 중남미 원주민들과 얼마나 다른가? 홍세화는 ‘파리의 택시운전사’ 시절, 국제미아가 되어 생존 자체를 위협받을 때, 어린 딸아이가 “왜 우리 집은 우유 안 사?”라고 물어볼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빵(생존)에 대한 불안감은 장미(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고. 그리고 “빵이 장미의 조건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빵에 너무 집착할 때 장미 자체가 사라진다”고 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우는 이유는 익숙했던 어머니 심장고동 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아, ‘불안’해서 우는 것이다. 영화 <라디오스타>에선 나밖에 모르는 마흔살 최곤(박중훈) 옆에 엄마 같은 매니저 박민수(안성기)가 늘 있지만, 영화일 뿐이다. 영화 <파이란>에서 위장결혼 아내였던 ‘파이란’의 유해를 바닷가에 뿌리며, 강재(최민식)는 비루한 자신의 삶이 슬퍼 새벽 부둣가에서 목놓아 운다. 그러나 영화 바깥에 사는 우린, 우는 것도 자유롭지 않다. 피터 드러커는 신문사에서 근무했던 초년 시절, 편집국장으로부터 “형편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해리슨 포드는 영화에 45초 단역으로 처음 출연한 뒤, 영화사 간부로부터 “자넨 안 되겠네”라는 말을 듣고 목수로 전업하기도 했다. 스타벅스 회장인 하워드 슐츠는 첫 직장인 제록스 세일즈맨 시절, 여섯달 동안 하루 50명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단 한 대도 못 팔았다.이런 이야기들이 ‘불안’에 빠진, 시험에 떨어진 그에게 위안이 될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권태호 국내정치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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