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2.18 17:05
수정 : 2006.12.19 01:16
권태선/순회특파원 겸 논설위원
칼럼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글은 삼가자고 다짐을 했다. 요즈음 너무나 많은 글들이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 적의에 찬 발톱을 드러내는 것 같아 끔찍스러웠기 때문이다.
양상훈 조선일보 논설위원의 <리영희와, 우상과 이성>을 읽고도 처음에는 또 그런 부류의 글이라고 치부해 버리자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적 글쓰기가 횡행하는 시절이라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눈감는 게 같은 언론인으로서 책임있는 자세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양씨는 1970년대 후반 대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리영희씨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인과의 대화>에선 문화대혁명이 아름답게 그려졌지만, 실제 문혁을 겪은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은 그 반대였음이 밝혀졌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이 시작이자 끝”이며 “글 쓰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했던 리영희씨가 자신의 책이 진실의 반대로 드러났는데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며 그의 이성은 어디로 갔는가고 물었다.
양씨가 글을 쓰는 목적이 진실의 추구라는 리씨의 글을 인용하며 그를 추궁한 것을 보면 그 역시 이 생각에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리영희씨의 책을 몇 권만 들춰 봐도 양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이 확인될 정도로 그의 글은 진실 추구와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리씨는 89년 그의 화갑기념 논문집에 실린 대담에서 중국 문제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능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한 것을 비롯해 여러차례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도덕주의적 인간과 사회의 실현) “가능성을 어느 정도 믿고자 하고 믿기도 했던 나는 비과학적인 이상주의자(또는 심하게 말해서 몽상병환자)였던가?”(<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166쪽)라고 자책하고, 자신의 오류가 객관적 검증으로 밝혀질 때, 부정된 부분을 고수할 생각은 없다면서 “후배나 후학들의 시야를 가리게 했다면, 선배 지식인으로서 가슴아픈 자책이라고 할 수도 있고, 반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미안하다고 할까, 이런 것을 다 합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위 책 224쪽)고도 했다.
리씨를 비롯해 한때 문혁을 이상화했던 지식인들이 그들의 과오를 인정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양씨의 주장처럼 문혁은 ‘지옥일 뿐이었다’는 단순한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역사비평> 겨울호는 문혁 40주년 특집에서 역사로서의 문혁 연구가 진척되면서 그동안 지배적 담론이던 권력투쟁론이나 희생자 중심의 시각을 넘어서는 다양한 문혁의 기억들을 복원하고 있는 학계 현황을 소개한다. <역사비평>은 특히 마오쩌둥식의 균등발전 전략을 포기하고 덩샤오핑이 ‘선부론’으로 요약한 불균등 발전 전략으로 전환한 중국의 최근 발전이 심각한 불평등과 관료주의를 낳으면서 중국 안팎에서 문혁 재평가를 촉발시키고 있다고 전한다.
양씨가 이런 사실을 몰랐다면 불성실한 것이고, 알고도 이를 무시했다면 리영희씨의 이성을 묻기 전에 자신이 정치적 목적에 휘둘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진 않았는지 물어야 한다. 언론, 그 중에서도 신문이 독자들의 신뢰를 잃어 온 데는 정치적 목적으로 사실 왜곡도 마다지 않은 자의적 글들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음을 그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대선 승리에 온 사회의 관심이 집중될 내년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진실 보도라는 최소한의 금도마저 지키지 않는 이런 정치적 글들이 난무할 경우, 그로 말미암은 사회적 대립과 언론에 대한 불신 증폭 등 그 후유증을 우리 언론이 어떻게 감당할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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