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2.28 17:13
수정 : 2006.12.28 17:13
|
신기섭 논설위원
|
아침햇발
세밑이면 마음이 바빠진다. 해놓은 것도 없이 시간만 간다는 생각에 불안해진다. 누구나 엇비슷할 것이다. 특히 요즘 파리 목숨인 월급쟁이 노동자들이라면 다가올 한 해에 대한 불안까지 겹쳐지기 마련이다. 새해에는 어떤 목표치가 떨어질지, 노동 여건은 나아질지, 일자리는 지킬 수 있을지, 별의별 생각으로 심란해하지 않을까. 일자리를 찾는 예비 노동자들도 매한가지겠다. 증오감에 찬 막말이 춤추는 사회 분위기는 불안감을 더 부채질한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가다듬자고 손에 쥔 어떤 책에서 하필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노동자는 노동의 외부에서야 비로소 자기 곁에 있다고 느끼고, 노동 안에서는 자기 바깥에 있다고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에는 그의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할 때에는 편안하지 않다. … 그런 까닭에 노동은 어떤 욕구의 만족이 아니라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말에 공감하지 않을 (예비) 노동자가 몇이나 있을까?
이런 구절도 있다. “인간(노동자)은 그의 동물적인 기능들,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것에서만, 기껏해야 그의 거주와 의복 등에서만 자발적으로 활동한다고 느끼고, 그의 인간적인 기능들에서는 자신을 동물로 느낀다 ….” 어떤 성취나 창조적 행위가 아니라 아파트 가격, 몸에 지닌 사치품 따위로 사람을 평가하는 세태를 연상시킨다. 현란한 상품 광고들이 부추기는 게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니 노동자들의 꿈은 ‘10억을 받았습니다’로 시작되는, 요즘 욕 많이 먹는 생명보험 광고의 주인공이다.
이른바 자기 계발서라면 이어질 내용은 뻔하다. 노동을 즐거운 일로 바꿀 의식 개혁 방법이나 노동에서 벗어나게 해 줄 성공 비결을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정반대로 나간다. 노동자가 부를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더욱 가난해지고, 더 값싼 상품이 되어가고, 더욱 소외된다고 주장한다. 쉽게 벗어날 길은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저주처럼 느껴질 이 책은 162년 전 카를 마르크스가 쓴 <경제학-철학 수고>다. 이 낡은 책이 며칠 전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강유원 옮김, 이론과실천) 재출간 이유가 자극적이다. “지금 다시 발간하는 까닭은 … 인간 사회의 저 심연에 자리 잡고 소멸하지 않는 악마적인 힘, 그 힘이 존재하는 한 그 힘과 대결해 낼 수 있는 사유의 무기로써 그 역할을 온전히 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현실을 꼼꼼히 분석하고 있다지만, 이땅의 노동자들은 이 딱딱한 책 없이도 자기 처지를 잘 안다. “긴장된 노동을 통해서만 인색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다는 것, 더욱이 그러한 노동을 발견한 불행을 행복으로 여겨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새해는 더욱 절망적이다. 비정규직의 확산과 고착화를 부를 법률이 지난달 말 국회를 통과했다. 또 지난 22일엔 필수공익 사업장 노조 파업의 힘을 빼놓고 부당 해고의 형사처벌을 면해주는 노동법 개정안도 국회를 통과했다. 이런 노동 조건의 퇴보가 여론의 무관심 속에 진행되는 동안,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조차 힘없는 소수의 무기력과 한계만 드러냈다.
그런 지경에 어느 누가 노동의 희망을 입에 담을 수 있으랴만, 한탄이나 회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경제학-철학 수고>가 살아남은 비결은 현란한 이론이 아니라 현실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불굴의 자세에 있다. 길은 현실을 제대로 보는 데서 나온다는 깨달음, 이것이 노동자의 진짜 힘이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