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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선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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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안녕, 은결아! 지난 세밑 ‘오래된 정원’ 시사회에서 너를 처음 보았다. 너는 참 눈부시게 아름답더구나. 그래, 그날 처음 만난 너의 아빠는 어땠니? 아빠 말처럼 괜찮은 사람 같기는 했어? 17년 동안이나 너의 곁을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던 아빠를 한번 보고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겠지. 너와 네 아빠의 첫 만남을 지켜본 뒤, 네 아빠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네가 아빠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아빠 세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내게도 너만한 딸들이 있어서일까? 아빠와 함께 싸웠던 세대 사람들을 통칭해서 ‘386 세대’라고 부르는 것은 너도 알지? 물론 네 아빠는 그 세대보다 조금은 위로 나처럼 70년대 대학을 다닌 것 같지만. 이들은 1970년대와 80년대 군부독재에 저항했고, 특히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각성해 군부 독재정권 타도에 앞장 섰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는 누가 뭐래도 이들의 투쟁과 희생 위에서 피어난 것이란다. 그렇지만 지금 너의 아빠 세대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단다. 민주화 운동 세력이 집권했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나날의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기 때문이야. 권력의 핵심에 들어 있으면서도 386 세력은 우리 사회의 방향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좀더 평등한 사회를 가져오리라던 꿈은 빈부격차 확대로 오히려 더 멀어졌다는 것이지. 그래서 한때 한국 사회 역동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386은 권력에 안주하는 기득권층이거나 무능의 대명사인양 비판받고 있단다. 나는 베트남의 하노이에 막 도착했어. 가난의 때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하노이 거리를 걸으며 너를 예쁘게 치장해준 임상수 감독의 말이 떠올랐어. 임 감독은 <씨네21> 대담에서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겨 현대 세계사에서 유일하게 정의를 실현했지만 그 승리가 이제는 “쓸쓸하고 가슴 아프고 피를 토하고 죽고 싶은 심정이 돼 버렸다”고 했지. 임 감독은 “도덕적으로 더는 순결할 수 없는 입장을 가졌고, 물리적으로 상대 안 되는 집단과 꿋꿋이 싸워냈고, 타협하지 않아서 승리를 얻어낸 인물”인 네 아빠가 그 도덕적 숭고함에 대해 누구 하나 존경을 표하지 않는 이 시대를 사는 심정이 그럴 것이라고도 했다. 너의 아빠가 ‘난 쓰레기야’라고 외친 것도 그런 심정의 고통스런 표현일거야.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디로 가야 할까? 386을 비롯한 숱한 민주화 운동가들이 오늘의 현실에서 느끼는 곤혹감이 바로 그런 것이겠지. 그래서 70~80년대 믿었던 꿈을 저버린 사람도, 잊은 사람도, 그리고 잊고자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을거야. 그러나 과거를 반성한다고 해서 정의를 추구했던 젊은날의 열정과 도덕적으로 순결했던 목표까지 잘못이었다고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해. 인간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도 있지 않니? 네 아빠가 갈뫼의 ‘오래된 정원’에서 너의 엄마와 함께했던 젊은날의 사랑과 그 간절한 사랑마저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시대를 되돌아보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낸 네 엄마의 삶을 통해 마침내 자기긍정에 이른 것처럼.그리고 네 엄마가 그린 가족의 초상화를 네가 아빠와 공유하듯, 역사는 그 이전 세대의 성과와 허물 위에 너희 세대가 만들어갈 새로운 오늘이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것일거야. 역사란 결코 단절될 수 없는 법이지. 너희 또래들이 네 가족 이야기에 흥미를 느낄지, 그리고 그 이야기에 무슨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하구나. 안녕! 하노이에서. 권태선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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