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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1.15 17:19 수정 : 2007.01.15 17:21

김회승 논설위원

아침햇발

17년간 칠레를 철권통치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대통령은 결국 법정에 서지 않고 세상을 떴다. 수천명을 정치적 이유로 학살하고 고문한 그의 범죄 행위도 역사 속에 묻혔다. 칠레 정부와 의회는 그를 법정에 세우려 무진 애를 썼다. 반인권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배제하고, 국가원수로서의 면책특권을 박탈하는 한편, 숨겨진 국외 재산도 들춰냈다. 그러나 법적 방어막들이 하나 둘 없어지자 피노체트는 아흔이라는 고령과 치매를 방패삼아 법의 심판을 피하려 했다. 칠레의 과거청산 노력이 거둔 결실은, “재임 기간의 모든 행위에 정치적 책임이 있다”는 그가 마지막 생일날에 남긴 말 한마디뿐이었다.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국제 관습법은 이미 반인도적 범죄의 시효를 오래 전부터 배제해왔다. 뉘른베르크에서 유고에서 르완다에서 그렇게 전범들과 민간인 학살 범죄를 단죄했다. 우리도 12·12 쿠데타 세력을 처벌할 때 공소시효를 정지시킨 소급입법을 적용한 전례가 있다. 위헌 다툼이 있었지만 당시 헌법재판소는 ‘보호할 만한 신뢰의 손실이 없거나 경미한 경우, 또는 그보다 공익상 필요가 더 큰 경우’ 등을 소급입법 금지의 예외로 인정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상징적이지만 지난해 정부는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 처벌법’ 제정안을 의결해 국회에 보냈다. 집단 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전쟁 범죄 등의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로마 규정’(2002년 비준)을 국내에서 이행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만든 것이다. 로마 규정에 따르면, 비준국이 이런 범죄를 스스로 처벌하지 않을 때 국제적으로 개입할 수 있고, 자국법상 친고죄나 반의사 불벌죄에 해당하더라도 공소를 제기할 수 있으며, 재판을 방해하는 행위도 처벌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적 한계는 뚜렷하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불법 구금·고문 등 각종 인권침해는 관할 대상이 아니다. 각 나라의 주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현실적 벽을 넘지 못한 탓이다. 소급효 금지 원칙이 있어 규정이 발효되기 이전의 범죄 행위는 책임을 따질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나면 죄를 처벌하지 않는 공소시효는 오랜 논쟁 거리다. 진실이 밝혀졌는데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부조리함 때문이다. 시효의 법 철학적 근거는, 시간이 지나 증거 부족 등으로 진실 발견이 어렵고, 범죄인도 형벌에 상응하는 고통을 치렀으며, 일반인의 처벌 욕구는 감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기관이 저지른 범죄는 사정이 다르다. 증거는 고의로 인멸·은폐된 경우가 더 많고, 범죄자들은 고통은커녕 여전히 권력을 누리며, 희생자들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동안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를 배제·중지하는 법안이 여럿 발의됐지만 매번 위헌 논란에 부닥쳐 흐지부지됐다. ‘법의 정의’와 ‘역사정 정의’는 다르다고 말한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이들이 법적 안정성을 이유로 법의 정의를 일쑤 외면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치 청산에 나선 독일 사회도 이런 모순과 반발에 직면했다. 그러나 “실정법의 정의에 대한 위반이 참을 수 없는 부정의에 이르렀을 때 법률은 정의에 그 자리를 양복해야 한다”는 법 철학과 판례로 이를 극복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20돌이 됐지만, 고문을 지휘하고 사건을 축소·은폐한 당시 권력자들은 여전히 진실을 숨긴 채 시효를 넘겼다. 수많은 박종철 사건이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부끄러운 날이 올지 모를 일이다.

김회승 논설위원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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