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1.25 17:14
수정 : 2007.01.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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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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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확신에 찬 주장이 늘 진실성이나 진정성을 더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여론을 그릇되게 이끌었다가 머지않아 잘못이 드러나기도 하고, 주장을 편 사람 스스로 훗날 판단이 틀렸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다른 속내를 감추기 위해 확신에 찬 듯 가장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국제통화기금(IMF) 협약 재협상론이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고금리 처방으로 대표되는 가혹한 아이엠에프 협약을 고칠 필요가 있다고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가 제기하자, 일부 보수언론은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재협상 거론이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며 아이엠에프 처방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행여 대선에 불리하게 작용할까 염려한 각당 대선 후보들이 줄줄이 미셸 캉드쉬 아이엠에프 총재한테 이행각서를 쓰는 ‘치욕’까지 겪었다. 그러나 아이엠에프 처방이 잘못됐다고 확인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엠에프도 시행착오를 시인했다.
1990년대 아파트 분양값 자율화 논란이 일던 시기에 건설부를 출입한 한 기자의 고백이다. “분양값을 자율화하는 게 시장원리에 맞는다고 확신하며 기사도 그렇게 썼다. 공급 확대로 집값이 더 안정될 것이란 일부 학자와 건설업계 주장은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러나 자율화 이후 전개된 상황은 달랐다. 잘못된 여론 형성에 앞장선 걸 많이 반성했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네 가지 우상이 있다고 했다. 요약하자면 인간이라는 틀(종족의 우상)과 개인의 주관적 성향이나 경험(동굴), 그리고 말에 의해 만들어지는 편견(시장), 잘 포장된 이론이나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데서 오는 오류(극장) 등으로 참된 인식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양원가 공개와 담보대출 규제 강화를 뼈대로 하는 1·11 부동산대책 이후 일부 언론의 보도 태도나 주택건설업계의 반론은 우상론을 되씹게 한다.
분양가 상한제와 원가 공개는 시장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나쁘다고 한다. 주택공급 축소로 이어져 집값을 올리게 될 것이란 주장도 편다. 여러 우상이 겹쳐진다. 현실의 주택시장은 정상적 시장 모습과 거리가 멀지만 시장원리는 그들에게 우상이 돼 있다. 건설업체들은 ‘주택사업을 할 수 없게 된다’며 ‘이윤이 남지 않는데 투자할 기업이 얼마나 있겠냐’고 반문한다. 언론은 이런 주장을 큼지막하게 보도하며 맞장구 친다. 그런데 과거 분양값이 규제되던 때 주택건설업체는 놀았던가. 폭리가 줄어들 뿐인데 이윤이 나지 않는다고 강변하는 건 그릇된 말로 또 하나의 우상 씌우기다. 서울 강남이란 동굴 속에 있는 이들이 내놓는 강남권 공급위축론이란 우상은 재건축 등 규제 완화 주장으로 슬쩍 이어진다.
주택담보대출 억제는 서민이 집 살 수 없게 하는 정책이라고 흠집 내기에 열심인 언론 보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조금만 눈을 돌려 보자. 상환 능력을 벗어나는 돈을 빌려 집 사게 부추기고, 그래서 언젠가 빚더미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게 내버려두는 것도 시장원리일까. 빚 얻기 좋게 해서 빚으로 집 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집값을 잡아 큰 빚 지지 않고 집 살 수 있게 하는 게 해법임은 자명하다. 좀 거슬러 올라가면 ‘세금 폭탄론’도 언론이란 권위가 덧칠하고 생산해낸 우상이다.
집값이 떨어질 기미도 보이나, 집값이 오르고 부동산 시장이 펄펄 끓어야 덕을 볼 이들의 반격도 거세다. 우상과, 서민을 위한다는 가식도 끼어든다. 단지 우상이 눈과 머리를 가리고 있다면 벗어나면 될 일이나, 거기에 잇속을 챙기려는 속내가 숨어 있다면 더 고약하다.
김병수 논설위원실장
byung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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