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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2.08 16:55 수정 : 2007.02.08 16:55

신기섭 논설위원

아침햇발

정부가 지난해 4월 한-미 자유무역협정 본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위헌 소지가 있는 소송제도를 미국에 약속했다가 뒤늦게 대책을 세우느라 부산을 떨었다는 것이 얼마 전 드러났다. <한겨레>가 확인한 ‘투자자-국가 소송제도 점검 태스크포스’ 회의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정부가 헌법과 충돌이 빚어지는 것도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일을 서둘렀다니 한심하다 못해 어안이벙벙하다. 모임을 연 것도 시민사회 단체들이 계속 문제삼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통상교섭본부는 뒤늦게 대책을 세운 게 아니라 민간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자리였다고 해명했는데, 그런 자리에서 법무부 사람이 “법무부는 애초부터 제반 문제를 제기해 왔다”며 이 제도를 협정에서 빼자고 주장한단 말인가?

그 이후 일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를 지속적이고 정열적으로 비판해 온 몇몇 신문들이 조용한 건 충분히 예상했지만, 시민들조차 너무 너그럽다. 무조건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자는 게 아니다. 헌법 수호의 의무를 지닌 정부의 태도만큼은 엄하게 따져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든 법률들을 소홀히 여기는 걸 그냥 두고봐도 된단 말인가? 이 일을 자유무역협정 반대자들만의 관심사로 여겨선 안 된다.

나는 헌법을 최우선에 두지 않는 정부를 믿을 수 없다. 헌법이야말로 권력의 횡포로부터 나를 지켜줄 마지막 보호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가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그것이 헌법을 비롯한 법률에 위반되지 않는지 제대로 따지길 요구한다. 법 중에는 악법도 있고 헌법도 완벽하진 않지만, 중차대한 결정조차 이에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독재의 잔재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헌법을 무시하는 건 정부만도 아니다.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고 못박은 21조를 비웃기라도 하듯, 경찰청장의 자유무역협정 반대집회 불허 결정이 용단으로 평가되는 게 현실이다. 노동 문제로 가면 더하다.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는 33조가 존중되고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합법 파업을 ‘경제를 볼모로 한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가는 건 식상할 정도로 흔하다. 대다수 기본권 관련 조항들과 달리, ‘모든 국민은’이 아니라 ‘근로자는’으로 시작하는 이 조항을 근거로 미등록(불법체류) 이주 노동자의 노조 설립을 허용하라는 판결이 나오자, ‘불법 행위자의 권리까지 보호하라는 거냐’고 반문하는 몰상식이 상식 대접받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전문가들도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주적이 북한이냐 미국이냐”를 따지는 사법시험 면접관은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하기를 다짐하는 헌법 전문과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는 5조를 정말 알까? 여기에 법률 문외한인 내가 알 수 없는 심오한 뜻이 있다면, 그건 모든 권력이 나를 포함한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는 그 헌법일 리 없다.

정부를 비롯한 지배층은 시민들이 헌법을 아는 게 두려울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감당하기 귀찮은 각종 권리가 담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헌법을 알아야 할 사람은 전문가들이 아니라 힘없는 시민들이다. 권리를 알아야 권리를 찾을 수 있다. 당장 헌법재판소 홈페이지(ccourt.go.kr)에 들어가서 헌법을 읽어보자. 그리고 적어도 기본권을 규정한 10조부터 37조까지를 정확히 기억하고 요구하자. 헌법을 더 아름답게 고치는 일은 그 뒤에 고민해도 충분하다.

신기섭 논설위원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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