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2.15 17:42
수정 : 2007.02.1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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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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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장기 국가발전 모형을 담은 ‘비전 2030’에 이어 ‘비전 국가 인적자원 활용방안’(2+5 전략), 2단계 국토 균형발전 대책 등 지난해부터 굵직굵직한 장기 정책들이 발표되자, 말기 정권이 책임지지도 못할 계획을 쏟아낸다는 비판이 거세다.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 보면 그리 볼 일만은 아니다. 이 말은 곧 집권 말기 1~2년은 그냥 ‘열중 쉬어’하고 있으라는 얘기가 되는데, 바람직한 정부의 모습이 아니다. 국가가 정권과 운명을 함께하지 않는 이상 필요한 일은 집권 초기든 말기든 해야 한다.
정부의 한 차관급 관료는 정권이 들어선 뒤 실제로 정책다운 정책을 펴며 일하는 기간은 임기의 절반인 2년 반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첫해는 정책 구상과 부처간 협의 등 논의로 다 보낸다. 이듬해쯤 돼야 제대로 일을 한다. 정책을 구체화하고 관련 법을 제정하거나 고친다. 그렇게 2년 반쯤 일하다 보면 정권은 ‘레임덕’에 빠져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게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정책이 제대로 효과를 내는 데는 정책 구상 때부터 5~7년은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권의 정책은 채 효과도 내기 전에 서랍 속으로 들어가기 십상이다. 그러니 장기 정책은 있어도 장기간 지속되는 정책은 드물다. 세계는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정부 시계는 반쯤 갔다가 멈춰서는 일이 반복되는 셈이다. ‘87년 체제’의 산물인 대통령 5년 단임제 아래서는 피할 수 없는 질곡이다. 집권 말기가 되면 여당이 구심력을 잃는 데도 이 탓이 크다. 사람의 행동은 인센티브에 좌우된다. 스티븐 레빗은 <프리코노믹스>에서 인센티브는 총탄이며 지렛대이자 열쇠라고까지 했다. 국회의원의 최고 인센티브는 다음 선거에서 공천받고 당선되는 것이다. 대통령이 다음 선거에서 아무런 인센티브를 줄 수 없다면 여당 의원들이 그를 바라보고 뭉칠 까닭이 없다.
이런 문제 의식은 어제오늘 생긴 게 아니고, 그래서 개헌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4년 연임제로 개헌하자고 제의했더니, 야당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정부 밖의 개헌 논의마저 오히려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 이유는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다. 개헌론을 두고 “상품은 좋은데 그걸 팔려는 사람이 싫어서 사지 않는다”는 말들도 한다. 일본 오사카 상인들이 사백년 전통을 이어오며 융성하는 것은 소비자에 대한 신뢰를 생명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오사카 상인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는 상도 가운데 하나는, ‘장사는 소비자인 상대방도 납득하고 상인인 자신도 납득하는 것’이다.(홍하상의 <오사카 상인들>에서) 노 대통령은 이 상도가 지닌 함의를 따르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개헌 제의를 수용하지 않는 게 오늘의 정치현실이다.
그렇다고 좋은 상품을 썩혀 두는 건 대안이 아니다. 대통령에게 고집 피우지 말라고 하는 건 현실적 충고라고 해도, 여론 주도층까지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대통령이 싫어서 개헌 논의를 계속 외면한다면 비겁하다. 오사카 상인들이 해법을 암시한다. 좋은 상품이 판매자 때문에 팔리지 않는다면 다른 판매자가 그 물건을 받아 팔게 하면 된다. 유력한 대선주자 중 한 사람이 먼저 낚아챈다면 좋은 물건까지 갖추었으니 한층 더 국면을 이끌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 걱정보다 지금 가진 우위를 놓칠까 몸사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여론 주도층이 나서야 한다. 여론이 움직이면 그들은 말려도 낚아챈다. 나라 장래에 견주면 노 대통령이 좋고 싫고는 하찮다.
김병수/논설위원실장
byung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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