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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3.05 17:36 수정 : 2007.03.05 17:36

신기섭 논설위원

아침햇발

‘꽃다운 나이’가 과장이 아닌 걸 절감하려면 꽃다운 나이의 갑절쯤은 살아야 하는 것 같다. 이 때늦은 깨달음은 제 젊은날의 아련한 기억과 함께 온다. 젊은이들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기쁨은 상실감의 초라한 보상이다. 그런데 이 기쁨은 가끔 부끄러움이 된다. 젊은이의 영정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낄 때도 그렇다.

또 한 사람의 ‘장호’가 먼 이국에서 희생됐다는 소식을 접한 충격 뒤에도 똑같은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신문에 실린 그의 얼굴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부끄러움이 더욱 크다. 27살의 국군 ‘윤장호’는 자신의 얼굴이 꽃처럼 아름다웠다는 걸 추억할 길이 없어졌다. 지난해 11월13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순찰하다 20살의 삶을 끝낸 미 육군 일병 ‘김장호’처럼 말이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자원해 입대한 이 젊은이의 얼굴은 아름답다 못해 가슴을 베는 칼날로 보였다.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에 동원됐다가 제 부모 가슴에 묻힌 우리 젊은이가 어디 둘뿐일까? 김 일병과 비슷한 때에 전사한 한인 미군만도 ‘김민희’와 ‘최규’ 두 사람이나 된다.

이 순간에 미군의 총에 숨져간 아프간과 이라크의 뭇 생명들, 제 목숨을 증오의 폭탄으로 내던진 아랍 전사들, 이유를 따져볼 여유도 없이 이 전사들에 맞서다 죽은 각국 병사들까지 생각할 여유는 솔직히 없다. 테러와의 전쟁이 이제 다른 민족만의 비극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당하기도 힘든다.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주검으로 돌아오는 걸 봐야 하는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견디기도 어렵다. ‘윤장호’ 충격이 온나라를 휩쓴 그날 이라크 자이툰 부대로 떠나는 남편과 아버지 앞에서 눈물짓는 부인과 아이들, 그 모습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군인의 사진을 보는 것도 고통스럽다.

이럴 땐 이 전쟁이 정의를 위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말을 듣는 처지가 차라리 속편할지도 모른다. 한-미 관계를 고려한 어쩔 수 없는 선택, 국익을 생각한 고뇌의 결정 따위의 초라한 명분보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편드는 낯선 적으로 취급될 게 뻔한 레바논 땅에까지 젊은이들을 보내려는 한국 정부는 밉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한국군이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철군한다고 전쟁의 비극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감정에 호소해 사태를 한쪽으로 몰아가지 말라고 야유할 이들이 상상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 가족과 다름없어 보이는 젊은이의 죽음 앞에서도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릴 수 있느냐고 묻고 싶다. 국익이라는 것이 정말 누굴 위한 것이냐고도 따지고 싶다. 제 나라 국민 한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걸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는 정부가 우리를 대표할 자격이 있냐고 따져묻고 싶다.

정부가 철군을 결단하지 못하면 ‘꽃다운 자식들’을 둔 부모들이 나서야 한다. 2005년 미국에서 반전운동에 불을 지핀 이는 이라크에서 아들을 잃은 평범한 어머니 신디 시핸이었다. 독재에 가장 강하게 맞선 이들도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민주투사는 ‘내 자식을 살려내라’고 절규한 민가협 부모님들이었고,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민주화 영웅도 ‘내 자식을 찾아내라’고 외친 ‘5월 광장 어머니회’였다. 부모의 사랑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4년에 즈음해 반전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이 목소리는 17일 파병반대 국민행동의 ‘이라크 침공 4년 규탄 국제공동 반전행동’ 행사 때까지 계속 커져 갈 것이다. 이번에도 그냥 넘기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아무도 모른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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