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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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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제3세계에 보급할 100달러짜리 노트북 컴퓨터 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미국 컴퓨터 과학자 니컬러스 네그로폰테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1995년에 〈디지털이다〉라는 책을 쓰면서 세계 최고의 ‘디지털 기술 전도사’로 알려지게 됐다. 그는 이 책에서 디지털 기술이 정보의 다양화, 탈중심화, 권력 분산을 유도해 민주주의를 촉진할 거라는 장밋빛 미래상을 그려낸다. 나는 그가 책을 홍보하러 96년 초 한국에 왔을 때 인터뷰한 적이 있다. 얘기를 듣다가 삐딱한 질문을 하나 했더니, 그의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널린 정보 가운데 진짜를 찾는 것이 정말 어려운 과제가 아니냐는 질문에 “판단의 기준이 제공자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이냐라면 문제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거대한 정보제공자에 더 의존하게 되지 않겠냐고 묻자 “뛰어난 요리법을 배우거나 낚시 기술을 익히는 데까지 거대기업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의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한겨레〉 1996년 1월16일치) 민주주의를 촉진할 정보의 다양성을 논하면서 요리법 따위를 예로 드는 데 말문이 막혔고, 그 탓에 인터뷰 뒷부분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순진한 건지 단순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맴돌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단순함은 99년 〈디지털 자본주의〉라는 책을 쓴 미국 언론학자 댄 쉴러와 비교하면 특히 도드라진다. 쉴러는 “미디어 역사는 유통 과정을 지배하는 것이 때로는 시장 지배력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며 “인터넷은 하나의 특수 이익집단, 즉 초국가적 기업을 위해 만들어진 일련의 네트워크 시스템 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일 뿐이다”라고 했다. 요즘 인터넷 이용자들은 쉴러가 아니라 네그로폰테에게 한표를 던질 것 같다. ‘1인 미디어’나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는 이용자 손수제작물’(UCC)을 찬양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일부 이용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실감하기도 하는 터다. 인터넷 덕분에 상위 20% 못지않게 하위 80%도 힘을 얻게 됐다는 이른바 ‘긴 꼬리’(롱테일) 현상까지 가져다 붙이면 ‘이용자 전성시대’의 꿈은 멋지게 완성된다. 그런데 정말 인터넷에서 몇분짜리 동영상 돌려가며 보고, 예쁘게 꾸민 블로그에 맛깔스런 글들을 올리는 정도로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그래봐야 부처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신세는 아닐까? 이 땅의 인터넷상에서 부처님 손바닥은 네이버로 대표되는 포털이다. 많은 이용자가 날마다 포털에서 전자우편을 확인하고 뉴스를 읽고 오락물을 접한다. 온갖 궁금증도 포털이라면 친절하게 답해준다. 블로그도 포털이 제공하고, 손수제작물의 놀이터도 포털이 제공하거나 연결해 준다. 포털은 많은 이들의 삶에 깊이 침투해 있다. 그래서 포털의 권력을 걱정하는 소리들이 높다. 하지만 ‘유통 과정을 지배하는’ 포털 권력의 성격을 걱정하는 소리는 약하다. 그 권력이 어떤 이익집단을 위한, 누구의 권력인지 좀처럼 묻지 않는다. 당신이 진짜 주인공이 되는 길은 손수제작물 만드느라 밤새는 게 아니다. 당신의 ‘놀이터’ 또는 ‘부처님 손바닥’을 따져보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금상첨화겠다. 거짓도 진실로 바꿀 수 있는 언론 권력,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나라의 운명을 걸겠다는 정부 권력, 집권을 눈앞에 내다보는 보수 정치 권력에 대해서도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자. 이 모든 권력이 진정 당신을 위하는 권력들인가?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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