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4.09 17:18
수정 : 2007.04.09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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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기/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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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1996년 유통시장이 개방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월마트가 시장을 쉽게 장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내 할인점들은 시장을 지키는 데 성공했고, 월마트는 초라한 모습으로 철수했다. 시장 개방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그러나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할인점들이 성장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았고, 중소기업들은 단가인하 압력으로 수익의 한계선상에 몰려 있다. 비정규직들은 한 달 80여만원을 받고 단순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국민에게 무슨 이득이 돌아갔을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이후 유럽연합, 중국으로 대상을 넓히자는 설익은 자유무역협정 확산론이 쏟아지고 있다.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경제 규모가 커진다고 국민이 모두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개방의 과실을 국민들이 고르게 나눠갖는 것도 아니다. 혜택을 보는 사람, 피해를 보는 사람이 따로 있다. 국익의 판단 기준을 국가가 아닌 국민에게 맞춰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의 자유무역협정은 대기업 수출을 늘리기 위해 다른 분야를 희생하는 방식으로 추진돼 왔다. 무역 의존도가 70%를 넘기 때문에 국외에서 성장동력을 찾아야 하며, 수출 대기업의 매출이 늘면 중소기업과 국민에게 이익이 흘러드는 트리클다운(물흐름) 효과를 본다는 발상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이미 입증된 낡은 성장론이다. 실제로 제조업 고용계수(산출액 10억원당 고용자 수)는 1995년 8명에서 2003년 3.8명으로 현저하게 감소했다. 그나마 정부가 자유무역협정의 경제적 이득이라고 제시하는 수치들은 대기업들 차지다. 일반 국민들에게, 매출의 76%를 내수에 의존하는 중소기업에 돌아갈 몫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한-중 자유무역협정 조기체결론은 성급함을 넘어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10일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방한은 성급한 낙관론에 기름을 부을 것이 틀림없다. 2005년 한국의 세계시장 점유율 1위 품목은 71가지다. 중국은 무려 867가지다. 농업이 문제가 아니다. 이들이 관세 없이 밀려들 때 살아남을 중소기업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1천만명이 넘는 중소기업 노동자들 역시 퇴로는 없다. 반대로 전자·자동차 등에서 국제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들은 특수를 누리게 될 것이다. 대기업은 날고 중소기업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림이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하면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쉽지 않은 얘기다. 세계적인 명품 업체들이 생산기지를 세울 만큼 중국의 기술은 우리와 근접해 있다. 한-중 협정은 결국 산업간, 계층간 격차를 확대시키고 고용 불안을 심화시킬 게 분명하다. 나아가 내수 부진이 성장의 발목을 잡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정부의 ‘비전 2030 보고서’도 “중국 효과가 소득분배, 고용기반을 악화시켜 내수 기반과 시스템의 안정성을 잠식하고 잠재 성장률을 끌어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장 개방을 거부할 수는 없다. 자유무역협정을 하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을 외치면서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추구해 온 참여정부의 정책이 후반부에 자유무역협정 일변도로 기우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성장 조급증에서 이젠 벗어나야 한다. 자유무역협정은 노무현 대통령의 말대로 ‘먹고사는’ 문제다. 되묻고 싶다. 성장만 하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지, 지금처럼 높은 성장세가 계속 가능하다고 보는지. 정말 먹고사는 문제라면 양적인 경제지표에 연연해하지 말고 국민의 삶을 판단의 중심에 놓아야 하지 않을까?
정남기/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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