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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19 18:39 수정 : 2007.04.19 18:39

신기섭 논설위원

아침햇발

32개의 꿈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4월16일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난무한 총알과 함께. 그 꿈이 무엇인지 알 길은 없으나 각자에겐 더없이 소중한 꿈을 조승희라는 젊은이가 앗아갔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의 꿈이 이 일로 함께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 슬픔을 위로할 방법도 찾기 어렵다. 꿈을 잃어버린 한 젊은이의 광적인 절망과 분노가 빚어낸 이 현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조차 힘든다.

소중히 간직한 꿈을 영문도 모른 채 빼앗기는 일은 다른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아프리카 수단의 다르푸르에서는 몇 해째 인종청소가 이어지고 이라크에서도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다. 지금 이 땅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의 꿈이 시들어가고 있을 게 분명하다. 똑같은 일도 미국에서 벌어지면 더 주목받는 게 현실이지만, 이번 일은 다른 비극들과 분명 다른 구석이 있다. 분쟁과 굶주림 따위가 빚어내는 비극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줄일 방법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문제라면 해결 의지가 있느냐다. 하지만 버지니아공대 사건 같은 일은 원인을 찾는 일부터 쉽지 않다. 그래서 더 두렵다. 어느날 갑자기 이유없이 찾아오는 폭력이 어쩌면 죽음보다 더 큰 공포를 만든다.

많은 사람이 온갖 추측과 분석을 동원해 사태를 설명해 보려 한다. 외톨이의 비정상적인 심리에 관심이 모아지고, 조씨가 쓴 폭력적인 내용의 짧은 희곡이 주목받았다. 부자에 대한 증오심을 담고 있는 조씨의 글이 공개되면서, 사태 분석은 또다른 방향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징후와 증거들을 다 모아도 진상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부자에 대한 적개심에 불탄다고 모두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조씨를 분석하는 일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어쩌면 공포에 맞서려는 의식적인 행위인지도 모른다. 일이 터진 뒤에 몰두하는 이런 분석이 큰 소득 없음은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 사건이 보여준다. 누구도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엘리펀트〉가 파란 하늘로 시작해, 비극 뒤에도 변치 않은 하늘을 보여주며 끝나는 게 이를 상징하는 듯하다. 살아 숨쉬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추상화하고 말 때, 머릿속에 남는 건 파란 하늘의 처연함뿐이다. 버지니아공대 사건도 어쩌면 애달프지만 아름다운 촛불 추모집회 사진으로 남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기서 끝나면 안 될 것 같다. 언제 또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나라에서 많은 한국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조씨만큼은 아니더라도 절망과 분노에 빠진 젊은이들이 우리 주변에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땅의 청소년들도 이미 꽤나 무서워졌다. 청소년 집단 성폭행 따위가 신문에 심심치 않게 오르내린다. 청소년 넷 가운데 한 명이 마음의 병에 시달린다는 설문 조사도 있다. 입시 지옥에서 시들어가는 학생들이 자신과 제 친구들을 절망의 끝으로 몰고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상황이 나아지는 기미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내 자식’만 물들지 않게 만들 방법을 찾기도 어렵다. 버지니아공대 사건은 조기유학 따위가 안전한 탈출구가 못된다는 걸 극단적으로 암시한다.

해법의 시작은 젊은이들의 꿈이 무너지고 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무너진 꿈을 되살릴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의 고통을 알아주면 새로운 꿈을 꾸게 해줄 수도 있다. 그러자면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건 너무 안일한 핑계다. 나 혼자 한다고 구조적인 문제가 풀릴까 싶은 막막함이 크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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