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5.21 17:26
수정 : 2007.05.2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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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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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외유성 출장이란 사실 표현부터가 맞지 않다. 출장 형식을 갖춰도, 주로 관광하고 즐기는 것이었다면 실체는 출장을 빙자한 외유다. 어떻게 일컫든 공직자들의 출장을 구실로 한 외유가 또 도마에 올랐다. 공기업과 공공기관 감사들의 떼거리 ‘외유성 출장’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고, 일부 서울 구청장과 지방자치단체 의원들이 비슷한 성격의 출장을 간 사실도 드러났다. 관행화한 고질병이다.
공직자들의 외유성 출장은 실제 들어간 돈 액수와 상관없이 국민을 불쾌하게 만든다.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소식에 국민은 아마도 모래밥을 씹는 듯한 기분이 들 게다. 나는 뼈빠지게 일해도 외국여행 한번 하기 힘든데, 잘나간다는 자들이 내가 낸 세금을 축내며 밖으로 나가 놀고 즐긴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법하다.
정부도 이번엔 그냥 넘기지 않을 모양이다. 주무부처인 기획예산처는 조처를 발표했고, 청와대와 감사원까지 나서 대책을 세우겠다고 했다. 불쾌한 일을 더는 보지 않게 될까? 장담 못한다. 분위기가 험악하니 얼마간만 조심할 게다. 늘 그래 왔다. 제도의 실효성은 운영에 달렸는데, 어차피 생선을 문 고양이들이고 외유성 출장을 무 자르듯 구분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인 만큼 제도가 보완돼도 빠져나갈 구멍은 많다. 공적 경비를 공돈쯤으로 여기는 몰염치와 관행이 바뀌지 않으면 치유되기 어려운 병이다.
몇 해 전 일본 경제단체 초청으로 다른 언론인 몇 명과 일본을 일주일 동안 다녀 온 적이 있다. 솔직히 반쯤은 바람쐬는 일정이려니 하는 마음으로 떠났다. 그러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대여섯 가지 일정이 잡혀 있었고 빠짐없이 진행됐다. 한 일정이 끝나면 담배 한 대 피우기가 무섭게 다음 일정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가며 인터뷰와 토론 등이 이어졌다. 일본 경제단체의 한 직원은 “미국이나 유럽 쪽 언론인 초청 때는 더 빡빡한데, 그나마 한국 문화를 고려해 좀 여유를 둔 것”이라고 했다. 그들에게 출장이란 그래야 하는 것이었고, 우리가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비록 경우는 다르나, 외유성 출장 파문을 보며 새삼 떠올리는 기억이다.
형식과 구실만 갖춰지면 꺼리낌 없이 공적 비용을 사적 쓰임새로 사용하는 건, 공공 부문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전반에서 볼 수 있는 후진적 관행이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계 기업에서 두루 최고경영자를 지낸 한 기업인의 얘기다. 그는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들을 만나 보면, 한국 기업의 일반 판매·관리비 지출 비중이 가장 높다고들 말한다”고 했다. 회삿돈으로 먹고 즐기는데 한국은 몹시 ‘관대’하고 무감각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예컨대 한국 기업에선 직장 회식이 있으면 그날은 회삿돈으로 배불리 먹는 날쯤으로 여기지만, 일본만 봐도 회식에 회삿돈을 쓰는 건 극히 예외적이며, 대부분 개인 돈으로 결제한다고 했다. 문화적 차이를 인정한다 해도, 한국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지니려면 상식을 벗어나는 수준의 관행은 고쳐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공공기관 감사들의 외유성 출장 파문을 계기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공과 사를 잘 구분하지 않는 의식 구조가 여전히 만연한 건 아닌지 되새겨 봤으면 한다. 우리의 소득 수준도 ‘내가 즐기는 것은 내가 치를 수 있는’ 정도로는 올라섰다. 중요한 직위에 있고 형편도 나은 편인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아직도 세금 축낼 돈으로 먹고 놀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파문은 또 터지고, 우리 사회의 후진적 관행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국민은 또 모래밥을 씹을게다.
김병수 논설위원실장
byung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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