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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04 17:36 수정 : 2007.06.04 23:18

정남기/논설위원

아침햇발

이건희 삼성 회장이 국외 출장을 갈 때는 항상 예행연습이 이뤄진다. 서울 한남동 집을 출발해 공항까지 자동차를 운행하면서 구간별 소요 시간을 스톱워치로 정확히 잰다. 심지어 공항에서 걸어가는 동선까지 점검한다. 시간만 재는 것이 아니다. 공항 가는 길에 눈에 거슬리는 것은 없는지 일일이 확인한다.

국외에서도 사전 작업이 이뤄진다. 선발대가 호텔방을 미리 점검하는 것은 물론, 방 안의 가전 제품을 모두 삼성 것으로 교체한다. 가족들이 쇼핑할 곳도 미리 확인한다. 불편한 점이 없나 확인하느라 하루 전에 직원들을 보내 물건을 사 보기도 한다.

재벌기업 총수들의 경영 행태를 황제경영이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특히 삼성에서 회장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모든 후속 작업이 신속하고 빈틈없이 이뤄진다. 이처럼 철두철미한 삼성이지만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때는 대부분의 법적 절차가 무시됐다. 이사회는 의결 정족수도 안 됐고, 구주주 청약기간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 회장 자녀들에게 돌아갈 몫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이 회장의 주식 지분은 별로 없다. 삼성전자 지분은 1.86%밖에 안 된다. 부인과 아들까지 합쳐도 3.17%다. 주인처럼 행세하지만 사실 일개 주주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삼성에서는 문서에 회장이나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이란 명칭을 잘 쓰지 않는다. 나중에 책임 문제가 불거져 논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과 3~4%의 지분을 가진 총수가 주인 행세를 하면서 대를 이어 경영권을 물려주고, 회사는 전체 주주의 이익보다 총수 일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며, 총수가 절대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 기형적 구조, 이것이 바로 삼성을 비롯한 많은 국내 재벌기업의 실상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비결은 순환출자에 있다. 계열사들이 서로 출자 관계로 얽히고 설켜 지배권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중심에는 삼성생명이 있다. 삼성전자의 사실상 최대주주로서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 고리다. 그뿐인가. 삼성생명의 자산 107조원은 그룹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계열사 지분을 확보해 그룹 지배권을 유지하고, 필요할 때 계열사에 자금을 지원할 수도 있다. 지배권 유지를 위해 계열사에 묻어둔 무수익 자산만 8조원을 넘는다. 다른 곳에 투자해 수익률을 높였다면 고객이나 주주들한테 돌아갈 몫이다.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가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를 막기 위한 금산분리 원칙을 폐지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알아둬야 할 게 있다. 금산분리 정책은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의 정책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1996년 ‘금융산업의 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금산분리를 명문화했다. 금융회사의 자금을 이용한 재벌기업들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규제를 푸는 것은 좋다. 그러나 공정한 경쟁을 위한 게임의 법칙은 필요하다. 특히 금융회사가 특정인을 위해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한나라당이 광주에서 경제정책 토론회를 열었던 지난달 29일 서울고법은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에게 전환사채를 헐값에 넘겨준 삼성에버랜드 전현직 경영진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총수 일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사회도 주주도 안중에 없는 재벌기업들한테 은행을 넘겨줄 수 있겠는가. 이명박 박근혜 두 주자는 금산분리 철폐를 외치기 전에 한번이라도 에버랜드 재판의 교훈을 곱씹어보기 바란다. 정남기/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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