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7.02 17:55
수정 : 2007.07.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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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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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거짓말도 등급을 매길 수 있다. 진실이 따로 있는 줄 뻔히 알면서 하는 거짓말이 가장 질이 나쁘다면,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거짓말이 되는 건 이보다는 훨씬 낫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는 말하는 본인에게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거짓말임이 드러나는 건 보통 나중의 일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다. 본심과 달리 결과적으로 거짓말이 됐다는 말은 변명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게다가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이 변명조차 통하지 않는다. 본심은 행동을 통해 증명하는 길밖에 없다. 공공을 상대로 하는 권력자는 더욱 그렇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거짓말 의혹이 가장 많이 제기되는 대상은 단연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관련된 말들이다. 지난해 문제가 됐던 4대 선결과제를 둘러싼 논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3월13일 국무회의에서 협정에 관해 우리에게 실익이 안 되면 체결하지 않는다는 자세로 임할 것과 시한에 연연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이는 20일도 채 지나지 않아 결과적으로 거짓말이 됐다. 정부 대표단은 3월 말로 예정됐던 시한을 48시간 연장해가며 합의안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시한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통령의 말을 협상단이 무시했다고 변명할 것인가? 아니면 시한을 연장한 것이야말로 시한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냐고 할 건가?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협정문 타결 직후 미국 의회에서 재협상 요구가 나오자, 핵심 관리들은 하나 같이 재협상은 없다고 했다. 일부 조항을 더하는 추가협상도 결국 재협상이라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덧붙였다. 이 말이 결국 빈말이 되기까지는 채 3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노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추가협상과 관련해서 “새롭게 제기된 노동·환경 관련 부분은 국제적 규범이나 국내 규범에 비추어서도 원칙적으로는 당연하고 지향해 나가야 할 조항”이라고 말했다. 듣는 이까지 민망하게 만드는 궁색한 합리화다.
이렇듯 책임있는 이들이 공개적으로 약속한 말들이 수없이 뒤집혀 결국 거짓말을 한 것과 다름없게 됐는데도 분명히 사과하고 책임지는 이가 없다. 공직자가 자신의 말을 이렇게 하찮게 여겨도 되는가? 아니면 ‘결과적인 거짓말’쯤이야 문제가 안된다는 것인가? 자기 비하인지, 오만함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거짓말이 무서운 것은, 거짓말이 계속 먹혀들거나 들통이 나도 별 문책을 당하지 않게 되면 갈수록 대담해진다는 데 있다. 이것이 극도로 가게 되면, 진실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이 결국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상태에 이른다. 이쯤 되면 거짓말은 윤리적 지탄의 대상을 넘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영국의 저명한 좌파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은 진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권력은 진실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진실을 들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 그렇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진실이 필요한 이들은 정치 권력을 비롯한 기득권층이 아니다. 정부가 협정 반대 텔레비전 광고물이 전파를 타는 걸 한사코 저지하려 한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진실이 절박한 이들은, 파산 지경에 몰린 농민들, 미국산 물건 때문에 일자리를 위협받을 노동자들, 광우병 공포에 떠는 소비자들이다. 이들에게 진실은 목숨이 걸린 문제다. 결국 마지막에 기댈 구석도 진실뿐이다. 그런데 진실을 얻기 위해 싸우자면 섣부르게 해서는 안된다. 이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버겁고 두렵지만 피해갈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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