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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05 18:36 수정 : 2007.07.05 18:36

여현호 논설위원

아침햇발

음모론은 ‘대단한 능력을 지닌 조직’을 전제로 한다. 곳곳에 자유자재로 힘을 뻗칠 수 있는 거대 권력이나 비밀스런 조직은 음모론의 필수 요소다. 아폴로 우주선이 실제론 달에 착륙하지 않았다거나, 케네디 대통령을 죽인 것은 오즈월드가 아니라거나, 9·11 테러는 자작극이라는 등 온갖 음모론에 미국 정부가 단골로 등장하는 것도, 미국이 엄청난 능력을 지녔을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큰 반향을 불러온 사건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거나 정보가 부족할 때, 또는 그 사건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을 때 등장한다. 일반적인 음모론이 그렇다. 드물게,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고 할 때 제기되기도 한다. 한국 정치의 음모론이다.

한국 정치에서 음모론은 대개 대형 비리 사건이나 정치적 의혹과 함께 나온다. 예컨대, 1997년 한보비리 사건으로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올랐던 당시 신한국당의 유력 정치인은 실세였던 김현철씨의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에서 터진 공천헌금 사건 때도 음모론이 나왔다. 각각 ‘당내 정적’과 ‘민주당을 말살하려는 세력’이 음모의 주역으로 지목됐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1990년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는 ‘내각제 합의 각서’ 공개로 난처한 처지에 몰리자 “공작정치”라며 맞불을 놓아 위기를 탈출했다.

요즘 풍경도 비슷해 보인다. 잇따른 부동산 관련 의혹을 받고 있는 이명박 한나라당 경선 후보는 “사유재산과 관련한 20년 전의 자료가 어디에서 나왔겠느냐”며 권력 개입 의혹을 제기했다. 집권세력만이 국세청의 국세통합 시스템과 행정자치부의 부동산정보관리센터 등에 접근해 이런 자료를 생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북한과 전·현직 대통령이 모두 자신이 대통령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의혹의 ‘내용’보다 의혹이 제기된 ‘의도와 배경’을 문제 삼는, 전형적인 한국식 음모론이다.

사실일까? 음모론은 몇 가지 그럴듯한 정황을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누구도 100% 아니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거꾸로 음모론에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다. 이 경우엔 이런 것이다. 집권세력이 그런 음모를 꾸밀 정도의 기획력과 실행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의 오늘이 이토록 지리멸렬할까. 곳곳에서 물이 새는 임기 말 권력 아래서 과연 모든 관계자들이 비밀을 지키려 할까. 답이 나오지 않는다. 대개 음모론은 그 대상을 과장한다.

음모론도 진실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진지한 정치적 주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진실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저들의 음모였다’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바람에, 사건의 진정한 원인과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음모론에 솔깃했던 눈길을 돌리면, 사건 그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문제는 ‘사람들의 눈길을 언제까지 음모론에 붙잡아둘 수 있느냐’는 것이 된다.

이번 경우는 그리 오래일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이번에 제기된 의혹들이 이 시대 한국인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돈과 부동산, 교육’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세력 간의 다툼이나 프리메이슨의 세계정복 음모 따위와 달리, 이런 문제는 바로 ‘내 문제’다. 언제가 됐건 의혹의 내용 그 자체에 눈길이 돌아가게 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얘기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 이 후보 쪽의 대응은 그들 자신에게 위험하다. 음모론으로 비껴가려 하면 의혹만 차곡차곡 쌓는 셈이 된다. 언젠가 임계치에 이르면, 터진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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