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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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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괴물이 판을 치고 있다. 필름 속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복판을 휘젓고 다닌 이무기가 현실로 뛰쳐나온 통에 인터넷은 불에 탄 검은 땅 꼴이 됐다. 기존의 모든 것은 녹아내려 사라질 판이다. 이른바 ‘기자·평론가와 네티즌의 전쟁’을 진단하는 이들은 애국주의, 유사 파시즘, 반지성주의 따위의 수식을 붙여가며 사태를 걱정한다. 하지만 많은 대중은 이런 걱정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잃을 것은 ‘영화가 지킬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할리우드와 겨룰 컴퓨터 그래픽’이 가져다 주는 자부심이라고 느끼기 때문일까? <디 워>를 보기 전엔 왜 이렇게 요란한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극장의 불이 꺼지는 순간부터 사태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할리우드 영화로 착각할 만한 화면 속에서 서양 배우가 ‘이무기’, ‘여의주’를 입에 담고 한국의 오래된 전설을 이야기한다. 이것만으로도 왠지 뿌듯하다. 미국에 대한 콤플렉스의 산물이라 해도 상관없다. “<쥐라기공원> 영화 한편이 현대차 몇백만대보다 더 큰 수익을 올렸다”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을 떠올리면서 이 정체 모를 뿌듯함은 최고조에 이른다. 자부심에다 경제적 잠재성까지 느낄 수 있는데, 서사구조가 부실하면 어떤가.(사실 서사구조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우들은 도망 다니기 바빠서 연기를 선보일 짬도 별로 없다.) 수백만 관객이 극장을 찾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심빠’라는 딱지도 개의치 않는 일부 누리꾼의 주장이 마냥 억지는 아니다. 자부심과 경제적 잠재성이라는 달콤한 상상의 대가만으로도 몇천원은 아깝지 않다. 영화가 올림픽 경긴 줄 아느냐는 비판은 ‘우리도 해냈다’는 자부심을 깨기엔 너무 허약하다. 영화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은 경제적 잠재성 앞에서 ‘먹물들의 잘난 척’이 되고 만다. 자부심과 경제적 잠재성은 뿌리가 같다. 한국인이 느끼는 자부심은 거의 전적으로 경제적 성과 덕분이다. 그리고 돈이 최고인 사회에서 경제적 잠재성은 최고의 희망이 된다. 게다가 이 가치는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네티즌’이 만든 게 아니다. 그들은 ‘먹물들’이 퍼뜨린 가치를 따를 뿐이다. 어차피 이 가치를 자신있게 거부할 자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가치보다 더 문제인 것은, 이무기에 박수 친 많은 사람들의 현실이 이 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 바닥이라는 사실이다. 멋진 컴퓨터 그래픽이 꿈꾸게 하는 경제적 가치는 쪼들리는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대리만족의 아편이다. 시장과 경제가 종교를 대신하는 새로운 종교가 됐다는 미국 신학자 하비 콕스의 말은 비유가 아니다. 눈앞의 진짜 현실이다. 이 새로운 종교 앞에서 예술은 허깨비가 되고, 아름다움은 컴퓨터게임을 연상시키는 이무기의 승천 장면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이 된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종교 앞에서 가장 무력한 것은 ‘비판적 지성’이다. 이 종교가 가짜라는 것, 이무기는 눈앞의 현실을 가리는 값싼 진통제일 뿐이라는 진실을 말할 목소리 말이다. 게다가 진실을 말할 의무가 있는 비판적 지식인들도 대부분 돈이라는 괴물에 항복한 지 오래다. 비판적 지식인이 사라졌다고 비판적 지성도 똑같은 운명에 처하는 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돈이라는 종교는 가짜”라고 외치는 순간 비판적 지성이 되살아날 수 있다. 돈이라는 괴물이 뿜어내는 불길로 온 땅이 재가 되기 전에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이 괴물은 ‘먹물들’만 골라서 희생물로 삼지는 않는다. 이무기에 박수 친 ‘당신’도 피해갈 길은 없다.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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