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9.13 18:51
수정 : 2007.09.13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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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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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재벌체제 탓에 쓰러진 기업을 애써 살려놓고 다시 재벌 손에 넘겨야만 하는가. 아이러니이나 현실에선 모범답안처럼 돼 있다. 대한생명은 한화그룹, 대우건설은 금호아시아나그룹, 대우종합기계는 두산그룹, 동아건설은 프라임산업에 팔렸다. 채권단한테 넘어갔다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등을 거쳐 되살아난 기업들이 그렇게 재벌 또는 준재벌로 넘어가고 있다. 부실을 초래한 옛 기업주한테 되돌아간 사례마저 있다.
재벌 체제는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난제 중 난제다. 기업에는 ‘오너’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다. 전문경영인 체제나 종업원지주회사 체제 등 다양한 기업지배구조가 병존하면 그런 도그마도 사라지겠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부실을 딛고 회생한 기업들이 어떤 지배구조를 갖게 될지는 그래서 더욱 관심사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매각된 기업은 모두 과거로 돌아갔다. ‘오너’ 없는 기업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는, 회생 과정에서 보인 가능성은 무시됐다.
아직도 대우해양조선 쌍용건설 등 매각되지 않은 굵직한 기업이 몇 곳 있다. 이들 기업도 재벌이 덩치를 키우는 데 보태줄 건지, 다시금 곱씹어 봐야 한다. 나는 매각작업이 진행 중인 쌍용건설을 그 시금석으로 본다. 쌍용건설은 ‘오너’ 없이 알짜기업으로 탈바꿈했다. 그런데 여느 워크아웃 기업과 다른 게 있다. 경영 정상화를 위해 채권단에 손을 벌리기만 한 게 아니라, 임직원들도 출자에 동참하며 고통을 분담했다는 점이다. 그것도 당시 주당 2760원이던 시가의 181%인 5000원에. 그 대가로 채권단은 채권단 지분 중 지분율 24.7%만큼에 대해 임직원들에게 우선매수 청구권을 주었다. 우선매수권을 행사하면 명실상부한 종업원지주회사로 바뀐다.
그러나 간단하지 않다. 관건은 채권단 보유지분(지분율 50.07%)의 매각 방식과 우선매수권 행사 가격이다. 자산관리공사를 비롯한 채권단은 공개 경쟁입찰에 부친 뒤 그 결과 나온 최고값으로라도 쌍용건설 임직원이 사겠다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최고값을 써낸 기업에 넘기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이렇게 되면 우선매수권 행사에 2천여억원의 돈이 필요하다. 고통을 분담한 대가도 없이 경영권 프리미엄을 고스란히 치르는 억울함도 크지만 임직원들이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다. 외부에서 재무적 투자자를 끌어들일 수는 있으나 시가보다 값이 너무 높으면 그도 어렵다.
다급했던 시기에 채권단과 맺은 약정서가 화근이었다. 제3의 인수자가 제시하는 가격에 우선매수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의 약정서다. 기업가치가 이렇게 빨리 높아질 줄 모르고 도장을 찍었단다. 그래도 탈출구가 없는 건 아니다. 약정서엔, 공개 경쟁입찰을 원칙으로 하되 매각협의회 의결을 통해 변경할 수 있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경쟁입찰을 하면 정부와 채권단으로선 경영권 프리미엄을 충분히 받고, 공적자금도 더 건질 수는 있다. 그러나 눈앞의 득보다 종업원지주회사도 번듯하게 경영하는 선례를 만드는 게 우리 경제엔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게다가 경쟁입찰을 통해 새 ‘오너’가 들어서도 쌍용건설 임직원은 2대 주주다. 새 ‘오너’가 자신들의 몫을 빼앗아 갔다는 반감이 없을 리 없다. 새 ‘오너’와 임직원의 이해가 부닥쳐도 지금처럼 순항할까? 이 물음에 정부와 채권단도 자유롭지 않다. 돈 많이 받고 팔기만 하면 된다는 건 무책임하다. 정책이라 할 수도 없다. 종업원지주회사가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실험 가치나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행히 경영이 잘되면 채권단도 경영권 프리미엄 이상의 득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정책적 선택을 할 수 있느냐다.
김병수/논설위원실장
byung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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