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9.20 18:01
수정 : 2007.09.2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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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기/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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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실학자 박제가가 1778년 청나라를 다녀와서 쓴 <북학의> 내편을 보면 수레에 대한 설명이 유독 많다. 소나 말에 직접 짐을 싣는 방식을 수레로 바꾸면 지역 간 교역량이 늘어나고 시간도 절약돼 백성과 나라 살림이 살찔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일종의 유통혁명론이다. 그는 실례로 “원산에서 미역과 마른 생선을 말에 싣고 와 사흘에 팔면 이득이요 닷새가 걸리면 본전이지만 열흘 머물면 본전을 못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벽돌 사용도 역설한다. 집과 성이 허술한 것은 일정한 크기의 벽돌을 구워 사용하지 않고 돌을 대충 다듬어 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먼저 수레를 개량하고 분업을 통해 벽돌을 생산한 뒤 이를 수레로 운반해 건축에 활용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실학 이론을 현실에 제대로 적용한 사례가 수원 화성이다. 공사 실무를 맡은 정약용은 1792년 화성을 둘레 3600보, 높이 9층(25척)으로 설계했다. 이어 공사에 3만2400 수레의 석재가 소요되며, 70대의 수레로 하루 세번씩 운반하면 154일에 운반할 수 있다는 분석까지 미리 마쳤다. 축성에 앞서서는 낙후된 수레를 개량했고, 도르래를 이용한 거중기도 만들었다. 또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지 않고 임금을 주고 고용했다. 그것도 성과급으로 했다. 재정 부담은 있었지만 일꾼들이 몰려들었고 신속하게 공사를 끝낼 수 있었다. 실천적 이론가로서의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처럼 실학이 꽃피게 된 배경에는 정조 개혁정치의 산실인 규장각이 있었다. 박제가, 이덕무, 정약용, 서유구 등의 실학자들은 규장각에서 신분과 당파를 뛰어넘어 함께 일하고 토론하면서 실학의 기초를 닦아갔다. 정치 개혁과 인재 양성을 향한 정조의 굳은 의지가 실사구시로 대표되는 실학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실사구시와 실용주의를 전파하기에 여념이 없다.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모병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데서 새도시 정책에 대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기존 당론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들고 있다. 손학규 대통합 민주신당 예비후보는 민생정책의 구호를 아예 ‘실사구시’로 정했으며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까지 들고나왔다. 정동영 예비후보 역시 중도 실용주의 노선을 취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아무래도 ‘실사구시’라는 용어 쟁탈전이 될 듯하다.
대선 주자들이 이념적인 잣대로 사회를 재단하지 않고 실용적인 입장에 서겠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념이란 틀로 본다면 진보와 보수의 간극은 영원한 평행선을 이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사구시가 요란한 말 잔치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변화와 혁신이 선행돼야 한다. 특히 인적 쇄신은 필수적이다. 낡은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구시대 인물들에 둘러싸여서는 진정한 실사구시를 기대할 수 없다. 잘못하면 정치적 필요에 따라 수시로 말을 바꾸는 모습을 실사구시로 포장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줄 수 있다.
이명박 후보는 최근 새만금을 두바이와 같은 국제도시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대운하, 나들섬에 이어 또 하나의 대규모 토목공사 거리다. 정동영·손학규 후보도 새만금 개발 공약을 줄줄이 쏟아냈다. 그러나 두바이를 건설하는 데 들어간 돈과 인력, 사업 추진자들의 의지와 열정을 얼마나 검토했는지는 의문이다.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새만금 하나 처리하기도 버겁다. 2년이란 짧은 기간에 수원 화성이란 세계문화유산을 빚어낸 정약용의 치밀한 축성 계획처럼 진정한 실사구시를 구현할 대선 주자가 한명이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정남기/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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