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1.22 18:15
수정 : 2007.11.2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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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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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제너럴일렉트릭에서 잭 웰치 후계자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제임스 맥너니는 2001년 스리엠(3M) 최고경영자(CEO)로 영입돼 갔다. 그는 2005년에 다시 보잉의 최고경영자가 됐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여성 경영인으로 꼽혔던 칼리 피오리나 휼렛패커드 회장은 루슨트테크놀러지에서 옮겨 왔다. 그의 후임인 마크 허드 회장 역시 앤시아르(NCR) 사장 출신이다. 최근 씨티그룹 회장에 오른 로버트 루빈도, 미국 재무장관을 지내기 전에는 세계적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 대표였다.
한국에서도 경영자 시장이 점차 열려가고 있긴 하다. 그러나 큰 재벌기업 사이에 최고경영자가 오가는 일은 드물다. 큰 기업의 경우엔 경영난에 처했으나 내부 인물로는 타개가 어려울 때 등 특수한 상황에서나 생긴다. 특히 ‘삼성 맨’ 또는 ‘현대 맨’ 식으로 분류될 정도의 전문경영인이 다른 재벌로 옮겨가 경영 능력을 발휘하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능력과 경험을 중시한다면 다른 곳에서 탐낼 법도 한데, 퇴직 후에는 자기 사업을 하거나 은퇴 생활로 접어드는 게 보통이다.
한국에선 왜 최고경영자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걸까? 조직문화를 꼽기도 한다. 경쟁 기업으로 가는 건 껄끄럽다고 한다. 배신으로 본다는 얘기다. 텃세도 한 요인이다. 한 전문경영인은 한국에선 아직 최고경영자의 능력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 경영을 잘해서라기보다는, 로비를 잘하거나 인허가를 잘 받는 등 경영 외적 능력으로 사업을 키웠다고 보는 인식이 여전히 많다. 게다가 강고한 총수 체제의 그늘에 가려 잘 돋보이지도 않는다. 잘못 튀었다가는 총수한테 속된 말로 찍힐 수도 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최근의 삼성 비자금 및 불법 로비 의혹 사건이 답을 던져준다. 불법 로비, 총수를 위한 비자금 조성과 경영권 승계 작업 등 법을 넘나드는 일이 다반사라면, 그룹 핵심 인 물감으론 충성도가 우선이다. ‘동지적 관계’다. 이들이 경쟁기업으로 옮겨가면 발뻗고 잘 수 없는 구조다. 그래서 퇴직 후에도 딴 마음 갖지 않도록 ‘충분히’ 돌봐준다. 김용철 변호사는 그런 점에서 ‘관리의 삼성’한테 뼈아픈 실수다. 비단 삼성만이 아니다. 다른 재벌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서로 치부가 있으니 다른 재벌 출신 최고경영자를 쓰려고도 하지 않는다. 일종의 묵계가 있는 셈이다. 돈을 만지던 재무통 출신 최고경영자는 더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삼성에서는 계열사 사장 출신이 다른 기업으로 가려면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를 영입하려는 기업도 삼성의 내락을 받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삼성과 등질 각오를 해야 한다.
2년여 전 안기부 엑스파일 사건이 터진 뒤 이건희 삼성 회장한테 한 지인이 ‘그룹의 핵심 인물들을 바꿔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사람 하나 키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드는데’라며 일축했다고 한다. 원론적으론 맞는 말이나, 그게 꼭 돈과 시간 때문만일까? 비밀이 많은데 곳간지기를 어찌 바꾸겠는가.
제대로 된 최고경영자 시장이 형성될 때, 그땐 한국기업이 투명성에서도 세계적 기업이 되는 시기가 될 게다. 기업의 내밀한 일까지 아는 최고경영자가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또 어느 때든 외부 인물이 최고경영자로 와 과거를 낱낱이 들여다 보게 되면, 딴짓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삼성 이학수 부회장이나 계열사 사장처럼 최고 반열에 오른 경영자라면 능력을 더 볼 것도 없이 다른 기업들이 줄지어 데려가려는 그런 시절이 언제나 올까. 비온 뒤 땅이 더 굳듯, 삼성 사건이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다.
김병수 논설위원실장
byung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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