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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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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이명박 대통령 취임이 꼭 한 달 남았다. 곧 대통령이 될 그가 지금 이 순간을 기대와 설렘으로 보낼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의 발걸음에 나라의 흥망성쇠가 걸렸다고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게다. 새 정부의 출범을 기다리는 국민이라고 크게 다를까. 결혼식을 코앞에 둔 신랑이나 신부가 기대만큼 걱정이 앞서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마당에 과거의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 언뜻언뜻 보이면 더욱 불안해진다.‘대불공단 전봇대’가 그런 것일 수 있다. 몇 년째 선박용 블록 생산업체들의 민원이던 전남 영암 대불공단의 전봇대 두 개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말이 나온 지 이틀 만에 뽑혔다. ‘탁상행정에 대한 질타’ ‘현장주의’라는 칭송이 쏟아졌지만, 꼭 그런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속사정을 들어보면 대불공단 전봇대엔 한국전력과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입주업체 사이 비용 분담 문제가 걸려 있었다. 마침 공단에선 전선 지중화율을 높이는 중이라고 한다. 시장원리로 생각해도 지중화 비용의 효용을 따질 필요가 있다. 이런 세세한 사정들은 당선인의 말 한마디에 모두 묻혔다. 그렇게 권력자의 뜻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게 바로 ‘인치’(人治)다. 현장을 자주 찾았다는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 때 익히 봐온 모습이다. 이 지점에서 지금껏 다듬어 온 제도와 시스템은 힘을 잃게 된다.
대통령직 인수위가 내놓은 정부조직 개편안도 께름칙한 구석이 있다. 거대 부처가 될 기획재정부는 행정 엘리트의 기획과 조정에 크게 기대게 될 게다. 과거 개발시대의 추진 동력이 살아나기를 기대한 것일까. 또, 작지만 조정 기능과 장악력을 강화한 청와대와 기능 중심으로 통합된 각 부처는, 재벌 회사의 강력한 기획조정실과 사업별 본부장 체제를 빼닮았다. 대통령의 ‘친정 체제’ 강화를 전제한 모양새다. 그만큼 추진력이 강해지겠지만, 삐끗할 위험도 또한 커진다. 그 비슷한, ‘황제 경영’의 폐해는 이미 충분히 겪었다.
그러잖아도 당선인이 자주 쓰는 말은 ‘해 봤어?’라고 한다.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지 말라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개발시대나 옛 병영에서 자주 듣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말로도 읽힐 수 있다.
‘옛 그림자’는 또 있다. 한나라당에서 벌어진 공천 갈등은 그것만으로도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는 계파 다툼이다. 어느 한쪽만 탓할 일은 아니겠지만, 승자인 이 당선인 쪽이 ‘독식’하려 한 데서 사단이 빚어졌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예컨대 당권과 대권 분리를 규정한 한나라당의 지금 당헌을 개정하자는 당선자 쪽 주장대로 하다간 당 총재인 대통령의 말이 일사불란하게 통하는 과거의 일인지배 정당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동안의 정치발전 논의는 그런 전근대적 정당 풍토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이 당선인은 “국정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안정 의석”을 얻고 싶다는 말도 했다. 비슷한 말을 한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소추의 대상이 됐다. 국회를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통법부 정도로 여긴 데서 비롯된 말 아니냐는 의심도 받게 된다. 그런 생각이 극단으로 치달은 게 바로 유신과 5공 신군부의 국회다.
이 당선인은 우리 경제가 고도성장을 구가했던 한 시대의 상징이다. 정주영과 박정희 아래서 잔뼈가 굵고 생각이 다듬어진, 옛날 사람이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된 그가 그들 시대의 패러다임에 머문다면 미래는커녕 당장의 문제도 해결하기 버겁게 된다. 당장 10년 전과 지금은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과 변화의 속도부터 다른 탓이다. 새로운 5년의 시작을 앞둔 지금,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여현호 /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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