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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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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북유럽의 신화는 날씨만큼이나 음울하다. 신화가 그리는 세계의 종말이 그렇다. “질서의 힘이 더이상 카오스의 힘을 밀어낼 수 없게 되면 라그나뢰크, 곧 신들의 최후의 전쟁이 온다. 눈보라와 화산 폭발, 홍수, 지진 등 자연재해가 평온했던 세계를 해체한다. 여름 없이, 전쟁으로 이어진 세 차례의 겨울 끝에 신들이 묶어둔 거대한 늑대 펜리르가 풀려나, 커다란 입을 벌려 주신(主神) 오딘을 삼킨다. 그의 형제인 큰 뱀 미드가르트는 하늘과 바다에 독을 내뿜는다.” 북유럽의 삼림과 광야를 휩쓸던 늑대는 사람들에게 지독한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신화는 라그나뢰크 훨씬 이전, 악업을 일삼는 펜리르를 잡아묶은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길게 묘사한다. 족쇄를 가볍게 부숴 버리고 포박도 끊어 버리는 괴력의 펜리르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명주실처럼 부드럽고 약해 보이지만 실제론 질기디질긴 마법의 끈 글레이프니르였다. 사실,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의심하는 펜리르의 목에 끈을 걸기 위해선 그의 요구대로 누군가가 그 입에 자신의 팔을 들이밀어야 했다. 그래서 전쟁의 신 티르가 팔을 잃었다. 우리에게도 진저리쳐지던 ‘늑대’가 있었다. 5공 치하의 대학에선 잔디밭이건 강의실이건 세 명 이상이 모여 있으면 예외 없이 주간지를 옆구리에 낀 점퍼 차림의 사내가 다가왔다. 경찰이었다. 강의실까지 예사로 드나드는 기관원 때문에 교수들도 입을 조심해야 했다. 학교가 그랬으니, 술집이나 거리도 자유롭지 않았다. 그리 먼 일만도 아니다. 90년대 초 어느날, 한담을 나누던 한 고참 특수부 검사는 어느 기관이 제일 세냐는 농 섞인 물음에 뜻밖에 진지한 얼굴로 “경찰이 제일 무섭다”고 말했다. 정보과 형사만도 수천명에 이르는 경찰 조직이 감시의 눈길을 조이기 시작하면 누구도 견디기 힘든다는 얘기였다. 경찰과 접촉이 잦았던 그는 그 무지막지한 힘과 촘촘한 신경망을 엿봤던 모양이다. 김현철씨의 위세가 등등하던 김영삼 정부 때의 여의도 신한국당 당사에서 만난 여당의 고위당직자도 비밀 얘기를 할 때면 전화기와 소파에서 멀리 떨어진 방 한귀퉁이로 사람을 데려가 귀엣말을 했다. 누구보다 국정원을 잘 알던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은 한두 달마다 다른 사람 이름으로 휴대전화기를 바꿨다. 모두 도청을 겁냈다. 그렇게 사찰은 바로 여기, 일상에 함께 있었다. 옛 얘기 속의 일이 아니라, 목덜미 바로 옆에서 거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찰을 없애는 것도 펜리르를 잡는 일 못지않게 힘이 들었다. 집권자들로선 다른 이들의 속내를 엿보고 싶은 유혹, 모든 것을 장악하려는 욕심을 버리기 어려웠을 게다. 그나마 국정원이나 기무사령부의 직접 보고를 없애고, 정치정보를 받지 않겠다고 대통령이 공언하면서 공공연한 사찰을 눈앞에서나마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국정 장악력이 떨어졌다는 비아냥을 듣게 된 것은 그 대가였다.이제 그 봉인이 풀리고 있다. 대운하를 반대하는 대학교수의 연구실엔 국정원 요원과 정보과 형사가 드나든다. 대학가 서점에는 ‘불온서적’을 찾는 경찰들의 발길이 다시 잦아졌다. 사찰에 이어, 월급 값을 하려는 공안 요원들도 나설 게다. 바로 공안정국이다. 다시 우리의 목덜미를 노릴 늑대를 풀어준 것은, 늑대를 사냥개로 부리려는 권력이다. 그리스 신화는 뛰어난 사냥꾼 악타이온이 여신 아르테미스에 의해 사슴으로 변한 뒤 자신의 사냥개들에게 물어뜯겨 죽는 얘기를 전하고 있다. 악타이온은 죽어가면서 “내가 너희들의 주인이야! 주인!”이라고 절규했지만, 헛될 뿐이었다. 비극을 피하려면 지금이라도 다시 봉인해야 한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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