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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24 23:05 수정 : 2008.04.25 12:05

여현호 논설위원

아침햇발

미국과 옛소련이 팽팽히 맞서던 냉전시대 서방엔 ‘크렘린학’(Kremlinology)이란 게 있었다. ‘크렘린 궁에 자리한 소비에트 정부 핵심의 동향을 연구하는 방법’ 정도로 정의할 수 있지만, 실상은 정보 부족을 메우려는 퍼즐 맞추기다. 소련 관영매체 보도에 나오는 요인들의 이름 순서, 장례식이나 군사행진 때 서 있는 위치 등 온갖 토막정보를 모아 세력관계의 변화와 정책의 변경을 판단·예측하는 게 크렘린학이다.

 요즘도 ‘크렘린학’은 있다. 의사 결정 과정이 불투명한 국가나 중요 집단이 대상이다. 관심사이긴 하되 제대로 공포되지 않는 일도 관찰 대상일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그렇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크렘린학의 관심 가운데 하나는, ‘누가 경제 실세냐’는 것이다. 경제정책 방향에 따라 많은 이들의 대응과 이해가 달라지게 되니 당연한 관심일 수 있다. 그에 더해, 공식 결정권자가 실제 힘이 있는지 분명치 않을 때, 또는 주요 인사들의 말이 서로 다르거나 왠지 흐름에 어긋나 보일 때 그런 크렘린학이 필요하다.

 상당수 관찰자들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애초 의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잠정 결론을 내린 듯하다. 책임 있는 이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만큼의 힘과 신뢰가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고, 섣부르게 그 앞날을 예측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런 판단에 이른 데는 대통령이 공식·비공식 자리에서 던진 말이나 작은 운신이 주요 근거가 됐을 게다.

 ‘누가 2인자냐’도 관심거리다. 정권의 2인자가 사실상 인사를 좌우한 게 지난 수십 년 정치사의 경험이니, 자리를 바라거나 크고작은 힘의 향배에 이해가 좌우될 이들에겐 큰 문제다.

 새 정부 출범 초기까진 2인자로 여럿이 거명됐다. 이제 그런 말은 쑥 들어갔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대통령의 말과 태도가 알려진 탓이다. ‘형님 공천’이나 ‘형님’의 수하가 중심인 청와대 정무·인사 보좌진의 문제를 지적하는 데 대해서도 대통령은 ‘뭐가 문제냐’며 내쳤다고 한다. 한국의 정보유통 속도는 생각 이상으로 빠르다. 구중심처의 얘기도 금세 관찰자들의 귀에 들어간다. 관찰자들은 대통령이 정치적 균형이나 명분 따위는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 듯하다고 판단한다.

 이 모든 관찰과 판단의 중심에 이명박 대통령이 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크렘린학은 관찰의 대상이 단 한 사람이다. 대통령 중심제의 특성 탓이겠지만, 그렇더라도 이 대통령의 경우는 더한 편이다.

 문제는 이 대통령이 첩첩으로 둘러싼 관찰의 시선을 그리 의식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말과 행동에 거침이 없다. 숭례문 화재 때 국민모금 발언도 그랬지만, 미국산 쇠고기 협상이 문제라는 지적에 대해선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쇠고기를 먹고 있는데 무슨 말이냐”고 대놓고 말했다. 파산 위기의 축산농가는 안중에 두지 않는 것으로 비친다. 대통령이 쌀이나 다른 상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턱 막힌다. 그의 말로 정부의 농업 및 통상 정책의 방향이 굳어졌다고 봐야 할 게다. 관료들은 누구보다 크렘린학의 열성적인 연구자다.


 자신의 몸짓이 미칠 파장도 가볍게 여기는 듯하다. 경제정책의 방향을 시장이 헷갈려 하건, 정치구도의 왜곡으로 정치권이 몸살을 앓건 그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일왕 앞에서 꾸벅꾸벅 고개도 쉽게 숙인다. 우리는 그렇게 대담한 대통령을 맞았다.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면 그의 앞을 막아서는 이가 아무도 없다.

여현호 논설위원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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