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5.26 19:38
수정 : 2008.05.26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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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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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석 달 열흘은 의미가 있다. 곰이 그 시간을 견뎌낸 것에서 민족의 신화가 유래하며, 아이가 한고비를 넘겼다고 해서 백일잔치를 해준다. 대통령학 학자인 데이비드 거겐은 국민은 이 기간에 새로 취임한 대통령을 평가한다고 했다. 평가 기준에 미달한 대통령은 열심히 해도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기 쉽지 않다. 5년 임기의 도입부에 불과하지만 그런 점에서 하프타임을 맞은 셈이다.
6월3일로 취임 100일을 맞는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과 불화를 겪고 있다.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시이오(CEO) 리더십’이다. 이 대통령은 15년간 현대그룹 최고경영자를 지냈으며 서울시장 4년도 따지고 보면 서울시 시이오였다. 그러한 성공신화가 대통령이 된 지금 그를 제약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어느 중견기업의 임원은 이 대통령이 오너 회장과 탄복이 절로 나올 만큼 똑같다고 한다. 자수성가한 회장은 철저히 일 중심이며 현장을 중시한다. 한번 결정하면 옆도 안 돌아보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판단이 뛰어나고 업무를 꿰뚫고 있어 절대 권력자인 동시에 시시콜콜한 것까지 챙겨 ‘담당’으로 불린다. 회장이 방침을 바꾸거나 이것저것 지시하는 날엔 비상이 걸린다. 회장은 분할통치하듯 임원 한 사람 한 사람과 일대일 커뮤니케이션을 해 전체를 보지만, 임원들은 퍼즐의 조각밖에 알지 못한다. 정보의 현격한 비대칭성 때문에 임원회의에서 다른 의견을 내거나 반대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며 받아 적느라 바쁘다. 새로 들어온 사외이사는 멋모르고 의견을 내다가 “교수란 사람이 그런 것도 모르고 …”라는 면박을 두어 차례 당하면 입을 다문다. 무한 책임감으로 끌어온 회장에게 무오류의 절대 권위는 체질화되어 있으며, 생존에 필수 요소다. 회장은 뛰어난 사업가지만 전형적인 독재자라고 그는 말한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 대통령이 아랫사람의 의견에 면박을 주고, 청와대나 정부 안에서 독재자처럼 굴 리는 없다. 그러나 그 역시 정보가 집중되고 성과로 말을 하는 시이오가 평생 직업이었으며 시이오 리더십은 그의 아우라요 트레이드 마크로 굳어 있다. 일사불란함을 요구하는 리더십의 속성상 조직 안에서 다른 의견을 내거나 제어를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울 것 같다.
시이오 리더십은 독과 꿀이 함께한다. 신속한 의사결정과 끊임없는 혁신, 효율성은 꿀이다. 반면 실적 지상주의, 독단과 배제는 독이다. 이 독은 기업경영에서는 희석될 수 있지만 국가경영에는 치명적이다. 기업은 효율성으로 굴러갈 수 있지만, 국가는 민주성 없이 운영될 수 없다. 민주성은 다른 가치를 인정하고 약자 편에 서는 것이다. 민주성에 바탕하지 않으면 효율성도 결국에는 기반을 잃게 된다.
이 대통령은 효율성의 유전자로 넘쳐나며, 민주성의 유전자는 결핍돼 있다. 쇠고기 협상에서 중대한 판단 착오를 한 것도 ‘시이오 프레임’에 갇혀 바로 옆에 떠다니는 변수들을 보지 못한 탓이다.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시이오 프레임을 벗어나야 한다. 이 대통령 스스로는 끊임없이 변신한다고 하지만 유전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시이오 리더십 이전에 민주적 리더십이 필요조건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민주적 리더십의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국민과의 대화는 그런 연후에나 가능하다.
경기 전 선수들은 감독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하지만 하프타임 때는 다르다고 한다. 뛰어보니까 쉽지 않은 탓이다. 전반에 실수해도 만회하면 되지만 후반에 실수하면 그대로 진다. 민주성의 결핍을 심각히 여기지 않으면 결격의 부메랑이 될 것이다. 민주화를 건너뛰고 선진화로 갈 수 없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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