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4.13 22:21
수정 : 2009.04.13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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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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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우리 형법에 ‘장식(葬式) 방해죄’라는 죄목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한겨레>에 연재되는 한승헌 변호사의 ‘길을 찾아서’를 읽다가였다. 1987년 8월 옥포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뒤 장지 문제를 놓고 실랑이가 있었는데,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가자고 ‘주동’했던 노무현·이상수 두 변호사에게 씌워진 죄목이 바로 장식방해죄였다. “장례를 주관해야 할 유가족들의 의사에 따른 장례절차 진행을 불가능하게” 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유죄 판결을 받은 이상수 변호사는 훗날 장례식장에 가면 “또 무슨 방해를 하려고 여기 왔는가”라는 농담을 듣곤 했다는 이야기도 곁들여졌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일어난 이런 종류의 ‘황당한 사건’들을 읽다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시대로부터는 ‘졸업’했다는 느긋함, 또 우리가 그런 험난한 세월의 강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구나 하는 대견스러움도 느껴진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나서는 별로 그렇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노무현씨가 20여년 만에 다시 검찰 조사를 받게 된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검경의 놀라운 ‘법률 적용 묘기’가 꼭 과거지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촛불집회 때 아기를 데리고 나온 유모차 엄마들에게 ‘아동학대죄’ 적용을 검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 바로 엊그제였다. ‘인터넷판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조롱을 받는 전기통신기본법상의 허위사실 유포죄를 적용해 누리꾼들을 잡아들인 것도, ‘희한한 법률’ 찾아 ‘올가미 씌우기’라는 점에서는 같은 계열에 속한다. <문화방송> ‘피디수첩’을 수사하면서 검찰이 내세운 혐의는 또 어떤가? 쇠고기 졸속 협상의 책임을 지고 경질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없는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도 그렇거니와, 쇠고기 수입업체의 업무를 방해한 죄라는 대목에 이르면 장식방해죄에 마냥 웃을 형편이 못 된다.
요즘은 누가 뭐래도 ‘검찰의 전성시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박연차씨의 비리 혐의가 터져나오면서 검찰 주가가 상한가를 치고 있다. 참여정부 출범 초 검찰의 체면을 사정없이 구기게 만든 장본인까지 법의 심판대에 세우게 됐으니, 검찰로서는 제대로 앙갚음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가만히 주변의 여론을 살펴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욕하는 데야 너나없이 한목소리지만, 그렇다고 딱히 검찰에 박수를 보내는 것 같지는 않다. 살아 있는 권력에는 약하고 죽은 권력에는 강한 검찰의 ‘변함없는 속성’을 일찌감치 간파했기 때문이리라. 또 검찰이 그동안 다른 사건에서 너무 속보이는 행태를 많이 보여준 탓도 작용하는 듯하다.
한동안 검찰 등의 단골 구호였다가 요즘은 슬그머니 사라진 게 있다. 바로 ‘국민의 신뢰 회복’이라는 말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여기저기서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사정기관으로 거듭나자”는 다짐이 울려퍼졌다. 때로는 그 앞에 “뼈를 깎는 각오로” 따위의 ‘살벌한’ 수식어까지 붙었다. 하지만 새 정부 출범 이후 그런 구호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미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확보해서일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당시에 그런 구호를 입에 달고 산 것도 사실은 ‘진심의 발로’라기보다는 달라진 시대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니 이제 그런 구호는 시효가 지났다고 여기는 것이다. ‘국민의 신뢰’보다 훨씬 중요한 ‘권력의 신뢰’가 있지 않은가. 세월이 지난 뒤, 다시 누군가의 회고록에 이 시대 검경의 희한한 법률 적용과 억지 수사가 다시 ‘조롱거리’로 등장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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