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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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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1가구 다주택자 양도세 완화 방안이 표류하고 있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의원총회까지 열어 격론을 벌였지만 당론을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 3월16일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폐지 계획을 호기롭게 발표했던 기획재정부의 처지가 난감하게 됐다. 이번 사안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한 달여 진행된 이 사안의 논의 과정을 되짚어보면, 정책 혼선으로 인한 국민 혼란보다 훨씬 본질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우선, 경제위기 극복을 빌미로 정부가 법의 지배라는 원칙을 스스로 허물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법을 무시하고 자체 규정이나 관행을 앞세우게 되면 자칫 행정 독재로 이어질 수 있다. 원칙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럴 가능성이 다른 정권보다 훨씬 높은 편이다. 특히 이번 사안은 조세법률주의라는 헌법상 원칙까지 뒤흔들었다. 조세법률주의는 죄형법정주의와 함께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번 다주택 양도세 중과 폐지를 추진하면서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기획재정부는 관련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하지 않았는데도 3월16일 양도분부터 양도세를 중과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당시는 개정안이 국회 통과는커녕 아예 국회에 제출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법률 개정안이 확정되려면 이를 입법예고한 뒤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밟는다. 수렴된 의견을 반영해 개정안을 다듬고 차관회의, 국무회의 등을 거쳐 확정한 뒤 국회에 제출해 통과시켜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당정협의를 마쳐 국회 통과는 문제없다며 이런 과정을 무시하고, 정부가 중과 폐지 방침을 밝힌 그날부터 바로 개정될 법을 적용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행정편의주의를 넘어 입법 절차를 철저히 무시한 위헌적 발상이다. 입법기관인 국회는 아예 설 자리도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관료들이 이런 위법적인 행위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행정부가 독자적으로 밀어붙인 게 아니라 당정협의를 거친 것이기 때문에 관계없다는 식으로 강변한다. 그렇다면 더 큰 문제다. 행정부뿐 아니라 여당까지 위법적인 행위의 공범임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안은 이런 절차상의 문제뿐 아니라 내용 측면에서도 이 정부의 정책이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정부가 다주택 양도세 완화를 추진하면서 내세우는 이유는 경기 활성화였다. 다주택 양도세 중과로 부동산 경기가 침체돼 있기 때문에 이를 풀어 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책 시행으로 이득을 보는 계층은 국민의 5%도 안 되는 3주택 이상 소유자다. 소수의 집부자들한테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강부자 정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한나라당이 무기명 여론조사를 해 당론을 정하기로 한 만큼 다급해진 정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여당 의원들을 설득하려 들 것이다. 양도세 중과 폐지 방침이 무산되면 그 혼란의 책임을 몽땅 정부가 뒤집어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행정부의 이런 곤란한 사정을 고려해 한나라당이 정부 방안을 그대로 승인해 주면, 한나라당은 입법부의 존재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고 조세‘행정’주의를 방조하는 꼴이 된다.한나라당이 당론을 어떻게 결정할지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이번에 드러난 이런 위법적인 상황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도 이를 묵인하고 지나간다면 ‘이명박식 법치’는 허울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될 것이다. 정석구 논설위원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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