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4.23 21:42
수정 : 2009.04.24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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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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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조만간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을 것 같다. 전임 대통령으로서 세번째 겪는 치욕이다. 안타깝고 실망스럽다. 도덕성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웠기에 배신감도 더욱 크다.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소리 높여 외쳤던 노 전 대통령의 흠이 검찰의 ‘중계’를 통해 낱낱이 전해지면서, 남녀노소, 지위 고하, 좌우, 지역을 가리지 않고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일부에선 “검찰이 문제 삼는 돈을 다 합쳐도 그 액수가 통 큰 전임자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아니냐” “검찰이 산 권력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죽은 권력만 맹렬하게 물어뜯고 있는 것 아니냐”는 동정과 비판론이 솔솔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진 노 전 대통령의 위선을 규탄하는 소리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비판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것이 아니다. 정도와 범위가 각기 다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비판은 노 전 대통령의 이번 잘못을 무한 확장해, 그와 관련한 모든 일을 통째로 들어내고 부정하려는 움직임이다. 이번 사건이 노무현 정치의 파탄을 상징하는 것이고, 노무현 정치의 파탄은 그를 지지했던 진영, 더 나아가 그가 주도했던 시대의 총체적 파탄이라는 게 이들이 전개하는 논리다. 마치 연좌제라도 부활한 느낌이다.
그 자신이 “이권 개입이나 인사 청탁을 하다가 걸리면 패가망신시키겠다”고 공언했으니, 그런 말을 하지 않은 사람보다 몇 배 더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고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번 일을 빌미로 ‘노무현 시대 5년’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 그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것과 ‘죄를 뺀 노무현’은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나아가 그의 시대가 이룩한 업적이나 가치, 정책까지 도매금으로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좋은 것은 가려서 보존해야 마땅하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평가가 갈리지만, 그의 시대엔 적어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한다고 누리꾼을 옥에 가두진 않았다. 뉴스 시간에 정권에 거슬리는 멘트를 날린다고 앵커를 갈아치우지도 않았다. 검찰을 위시한 권력기관들이 윗사람의 한마디에 사냥개처럼 달려들어 목표물을 물어뜯는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사법부의 고위층이 일반 판사들의 재판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간섭하는 일도 없었다. 대기업 총수들이 선거 때만 되면 없는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 국외 출장을 떠나는 관행도 사라졌다. 정권에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해서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직과 예산을 축소하는 보복도 하지 않았다. 일제고사 성적 순위 공개로 학교를 경쟁의 정글로 만들고, 이런 문제점을 지적한 교사를 학교 밖으로 내모는 일도 없었다. 즉, 노무현 시대는 적지 않은 정책적·정치적 실패를 남기기도 했지만, 어느 정권 때보다 인권과 민주주의가 많이 전진한 시기였다는 점까지 부인할 순 없다.
또한 영남 비주류와 고졸 출신의 아웃사이더 대통령으로서 그가 소수자들에게 안겨줬던 꿈과 희망도 덩달아 삭제해서는 안 될 대목이다.
그럼에도 노 전 대통령이 도덕성을 무기로 정치적 반대자를 제압하려고 한 것은 발상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도덕성은 공동체 구성원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덕목이지 누가 혼자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누리집에 마지막으로 올린 글에서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다. 저를 버려 달라”고 한 것은 통렬한 자성의 결과일 것이다. 이참에 그를 ‘도마 위의 어육’ 다루듯이 난도질하고 있는 사람들도 ‘내 손은 깨끗한지’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오태규 논설위원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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