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20 21:21
수정 : 2009.08.2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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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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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분쟁이 있을 때 사람들은 말한다.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그러나 실제 그런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특히 가치와 철학이 다른 사람들은 서로 쉽게 이해하고 화합하기 힘들다.
절대왕정 시절 유럽은 종교개혁을 둘러싼 신교와 구교의 대립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신교의 자유가 허용된 뒤에도 100여년에 걸쳐 처절한 피의 투쟁이 이어졌다. 때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 때로는 폭동, 때로는 전쟁으로 형태를 달리했지만 그 바탕에는 오랜 종교적 갈등이 깔려 있었다. 승자는 없었다. 신교와 구교 모두 세대가 바뀌고 시대가 달라지면서 세상에 맞춰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사람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합한 게 아니라 시대가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적응하고 변화하도록 만들었다.
양자역학을 창시한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더욱 생생한 얘기를 들려준다. 그는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론자를 설득해 인정하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게 아니라 반대론자들이 죽고 그 진리에 익숙한 새 세대가 자라남으로써 승리한다”고 말했다. 과학이론조차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기존 관념을 바꾸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나마 서로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는 계기가 있다면 죽음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 멱살잡이를 하던 사람들도 죽음 앞에선 겸손해진다. 추모 대열에 서서 함께 머리를 숙이고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이곳에서만은 모든 갈등과 대립이 치유되는 것처럼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듯이 그는 죽음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갈등과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죽음의 프리미엄이다.
결국 죽음을 통해서만 화합할 수 있는 것인가? 이는 진정한 화합의 논리라기보다는 시간이 지나 과거를 잊음으로써 화해를 이루는 망각의 논리다. 또한 역설적인 사실을 말해 준다. 갈등과 대립의 당사자들이 살아서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우리 현대사도 그랬다. 겉으로 드러난 모양은 달랐지만 끊임없이 갈등과 대립이 계속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을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헌신했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냄으로써 민주사회로의 이행을 완수했다. 자신을 억압하고 핍박했던 독재자들을 용서하고 정치보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 사회의 갈등이 해소되고 국민적 통합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영호남의 지역갈등, 진보-보수의 이념대결은 그 골이 더 깊어졌다. 특히 지역갈등 해소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격화된 이념대결의 와중에서 해법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거기까지가 그의 한계다.
김 전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그의 시대는 갔다. 이는 정신적으로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세대의 시대가 갔음을 의미한다. 나이에 상관없이 동시대적 정서를 갖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시대도 함께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가 우리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다. 미래의 비전을 찾고자 한다면 그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철학,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는 일이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민주당은 이제 고아가 됐다”고 말했다. 물론 아쉽겠지만 민주당도 이젠 디제이의 손을 놓아야 한다.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듯 담담한 마음으로 그를 보내야 한다.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정남기 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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