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10.01 17:04 수정 : 2009.10.01 17:04

김종구 논설위원

그때도 추석 무렵이었다. 1990년 9월 말, 전국 경찰서와 일선 파출소에는 기묘한 수배전단 하나가 일제히 나붙었다. 달랑 수배자의 이름과 얼굴 사진만 있을 뿐 구체적 인적사항도, 혐의 내용도, 수배 관서도 없는 전단이었다. 어떤 기관인지 모르지만 그를 잡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10월4일 오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 전단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바로 보안사에서 탈영한 윤석양 이병이었다.

그리고 19년의 세월이 흐른 뒤, 군의 민간인 사찰 망령이 또다시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모든 게 뒷걸음치는 세상이라지만 역사의 역류를 이처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없다. 게다가 사정은 더 고약하다. 당시 정부의 대응은 신속하고도 솔직했다. 윤 이병의 폭로 뒤 불과 나흘 만에 국방부 장관과 보안사령관이 경질됐고, 신임 국방장관은 “법적 근거 없는 월권행위”라고 잘못을 시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민간인 사찰의 꼬투리가 잡히고 나서 50일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오히려 혐의자 쪽이 더 큰소리를 치는, 물구나무선 풍경이다.

거꾸로 가는 행태는 단지 기무사나 국방부만이 아니다. 언론의 뒷걸음은 더욱 놀랍다. 당시 노태우 정부가 곧바로 항복을 한 데는 언론의 공도 컸다. 윤 이병 탈영 직후부터 사건을 깊숙이 취재해온 <한겨레>야 말할 것도 없고, <동아일보>도 적극적이었다. 당시 김중배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성유보 한겨레 편집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 요청까지 했다. “윤 이병이 갖고 나온 문건과 자료 중 한겨레가 먼저 기사화한 것들은 계속 넘겨 달라.” 두 신문이 앞장서자 다른 언론들도 뒤이어 일제히 융단폭격에 가세했다. 2009년 가을, 대부분의 언론은 침묵 모드다.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의혹이 제기된 다음날 아침 동아를 비롯해 조선·중앙의 지면에서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정의감에 불타던 젊은 기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은 대부분 고위 간부로 성장해 요직에 포진해 있다.

그러면 국회는 어떤가. 당시 국회 국방위는 신임 이종구 장관을 취임 이튿날부터 불러 추궁했고, 그해 12월까지 국방부 합동조사단 결과 보고, 국정감사 등을 숨가쁘게 이어갔다. 2009년 9월18일, 김태영 국방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김 후보자가 서면답변에서 “민간인 사찰이 아니다”라고 밝혔으나 적극적으로 파고든 야당 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민주당의 인사청문회 위원 중에는 당시 사찰 대상자에 포함된 분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무사태평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빚어지는 걸까. 동향파악 대상자가 당시에는 1300여명에 이르고 그 안에 내로라하는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포함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사찰 대상자가 평범한 회사원, 주부, 민노당 당직자 등에 불과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군과 관련이 있는 적법한 수사 과정”이라는 기무사의 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일까. 그 어떤 것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군의 민간사찰 의혹은 그 규모나 대상자의 지위 고하에 따라 ‘차별대우’할 사안이 결코 아니다. 기무사도 애초 공언과 달리 그동안 상당한 시일이 흘렀는데도 납득할 만한 수사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러면 앞으로의 전망은 어떤가? 한마디로 어둡다. 지금 흘러가는 모양새로 봐서는 일종의 미스터리로 끝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게다가 이 정권의 특기 중의 하나가 바로 어물쩍 뭉개고 넘어가기 아닌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유치를 계기로 ‘국격’이 높아졌다고 떠들썩한 이면에 드리워진 2009년 가을의 스산한 풍경화다.

김종구 논설위원kjg@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아침햇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