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0.05 21:54
수정 : 2009.10.05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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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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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차례상을 물린 뒤 오가는 이야기에 심각한 토론거리가 뭐 있겠는가. 아이들이 그새 몰라보게 컸다거나 살 빠졌다는 덕담에서부터 집안 대소사, 그리고 그때그때의 시사 현안까지 제멋대로 가지를 뻗어가기 마련이다. 올해 한가위에는 아이들 입시에서 정운찬 국무총리의 사람됨, 그가 수정하겠다는 세종시 문제로 화제가 옮아갔다. 그런데 몇 년 안에 세종시로 근무지를 옮기기로 되어 있는 집안 동생의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하다. 옮길지 말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옮긴다 하더라도 애들 교육 때문에 가족이 다 이사할지 따위 고민거리가 한둘이 아닌데 정작 이전 여부부터 불투명하니 도통 계획을 세우지 못하겠다는 얘기다.
그러잖아도 진작부터 광화문이나 과천 관가에선 ‘안 갈 것 같다’는 귀엣말들이 흘러다녔다. 올해 4월로 예정됐던 세종시 정부청사 1단계 2구역 공사가 한 차례 연기되더니 정 총리 발언에 이어 9월 말 또다시 미뤄지면서 그런 분위기는 더 공공연해졌다. 이젠 간다고 믿고 준비하기가 더 께름칙한 상황이다.
한두 해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게 세종시 문제만은 아니다. 교육은 더하다.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교육정책이 바뀌면서 대학입시 제도만도 이미 십수 차례 달라졌다. 정부가 발표한 대학입시 제도와 달리 실제 입시가 치러지는 경우도 많다. 2004년에 발표된 2008학년 입시가 그랬다. 그 발표를 그대로 믿은 사람들만 억울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학부모와 학생들은 이제 정부 말을 곧이듣지 않고 ‘가능한 모든 경우’에 대비한다. 이명박 정부가 점수 위주 입시 관행을 깨겠다며 확대하는 입학사정관제도 그런 불신에선 예외가 아니다.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정책을 믿었던 이들이 바로 이어진 집값 폭등으로 겪어야 했던 배신감은 컸다. 반면,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중과에 ‘대못’이 쳐졌다는 전임 정부의 말을 믿고 여분의 부동산을 진작 처분했던 이들은 정반대로 치닫는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정책에 땅을 치며 아쉬워했을 것이다.
그런 ‘예측 불가능’으로 인한 피해는 얼마나 될까. 혼란이나 기회비용 따위 개인적 손실 말고도 나라 차원의 피해가 결코 작지 않다. 세종시 문제의 경우 이미 들어간 국고만도 토지보상비를 포함해 5조원이 훌쩍 넘는다. 20조원을 넘긴 뒤에도 여전히 상승 기세를 멈추지 않는 사교육비, 이미 2006년 수준으로 뛰어오른 집값과 전세금 등 사회적 비용도 많다.
더 큰 문제는 예측 불가능성에 대책 없이 노출된 국민의 정부 불신이다. 다산 정약용은 <논어> ‘안연’편의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民無信不立)는 말을 두고, “백성이 믿는다는 것은 윗사람의 법령을 믿는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여야 합의에 따라 법률로 정한 세종시 건설이나 부동산세제 등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버선목 뒤집듯 바꾼다면 국민이 정부 정책을 믿지 않게 된다. 그런 식이라면 4대강 사업이 몇 년 뒤까지 이어지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불신으로 인한 비용은 이미 계산이 나와 있다. 세계은행 수석연구원인 스티븐 낵과 필립 키퍼는 “다른 조건이 동일한 상태에서 국가 신뢰지수가 10% 떨어지면 경제성장률은 0.8%포인트 하락한다”며 신뢰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영 컨설턴트인 스티븐 M. R. 코비도 신뢰라는 것이 무형의 도덕률이 아니라 절반의 비용으로 두 배 이상의 경영성과를 창출해낼 수도 있는 유형의 경제자산이라고 말했다. 세종시의 ‘효율성’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귀기울여 들을 말이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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