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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0.12 21:05 수정 : 2009.10.12 21:05

오태규 논설위원





남대문 참사, 용산 참사만 있는 게 아니다. 외교에도 참사가 있다. 아프지 않은 참사가 어찌 하나라도 있으랴만, 외교 참사의 아픔은 유별나다. 겉으론 상처가 보이지 않는다. 사고 발생과 통증 지각 사이의 시간적 거리도 멀다. 그래서 사고를 친 사람이 책임을 회피하기도 쉽다. 하지만 통증이 깊고 오래간다. 더욱이 피해자가 나라 전체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회심의 카드로 내놓은 ‘그랜드 바겐’(일괄타결)이 나라 안팎에서 동네북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핵심 당사국인 미국과 북한의 반응이 싸늘하다. 출산하면서 바로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다.

한-미 간 북핵 협의의 미국 쪽 실질 책임자인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이 안이 나오자마자 “잘 모르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그러자 며칠 뒤 이 대통령이 “미국의 아무개가 모르겠다고 하면 어떤가”라고 되받았다. 북한 문제에 대해 “숨소리까지 공유”한다는 한-미 사이에 생긴 심각한 불화이다. 캠벨 차관보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첫 아시아 순방을 준비하기 위해 어제부터 일본과 중국은 들르면서 한국을 빼놓은 것을 이와 떼어 생각하기 어렵다. 오바마 대통령이 순방 일정을 일본→중국→한국 순으로 짠 것도 심상치 않다. 북한은 더욱 신랄하다. <조선중앙통신>은 ‘허황된 꿈’, ‘백해무익’이라는 용어를 쓰며 일소에 부쳤다. 그나마 “그(이 대통령) 자신도 문제이지만 그를 세상 망신만 시키는 ‘대통령 보좌팀’의 수준이 더욱 한심하다”며 최악의 비난을 삼간 것이 다행이다. 10일의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일본과 손을 잡고 그랜드 바겐을 밀어붙이려던 계획도, 중국의 대화우선론에 막혀 무산됐다. 그랜드 참사이다.

내부 비판도 가혹하다. 노무현 정권의 마지막 외교장관을 지낸 송민순 민주당 의원은 그랜드 바겐이 이 대통령이 연설을 한 미국외교협회 사이트엔 ‘선 핵폐기론’으로 소개된 점을 지적하며, 상황인식도 해법도 틀린 ‘그랜드 일루전’(커다란 착각)이라고 꼬집었다. 한나라당의 남경필·윤상현 의원조차 비현실적인 안이라고 가세했다.

그동안에도 간간이 크고 작은 외교 참사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남북 대결 외교가 한창이던 1975년의 페루 리마 비동맹회의 가입 실패 사건이다. 남북이 동시에 가입 신청을 했으나 북한만 가입에 성공했다. 그 뒤 김동조 당시 외무장관이 경질됐다. 김대중 정권의 초대 외무장관이었던 박정수 장관도 러시아 스파이 맞추방 사건을 잘못 처리하는 바람에 5개월 만에 옷을 벗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지난해 7월 아시아지역포럼 때 의장 성명에 들어 있던 10·4 남북 공동선언 지지 문구를 들어내는 외교를 하다 국제적 망신을 샀다. 그 일을 진두지휘했던 유명환 외교장관은 정권의 코드에 충실했기 때문인지 아직까지 건재하다.

그랜드 바겐이 불러온 참사는 이전의 것들과 격이 다르다. 이전의 것들은 모두 밑으로 책임을 돌릴 수 있었다. 대통령의 입김이 아무리 짙게 작용했어도 직접 나서지 않은 이상, 꼬리 자르기가 가능했다. 이번은 참사를 일으킨 사람이 바로 대통령이다. 사람을 바꿀 수 없으니 말뜻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랜드 바겐의 뜻이 애초의 ‘원샷 딜’(One shot deal)에서 ‘일괄타결’ ‘포괄적 패키지’로 오락가락하고 있는 이유이다. 며칠 사이에 같은 용어에 다른 설명을 달자니 일관성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애초의 원샷 딜, 선 핵폐기론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얼마나 망신이고 구차한 일인가. 결론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태규 논설위원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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