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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0.19 20:51 수정 : 2009.10.19 20:51

신기섭 논설위원

요즘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눈여겨본다. 지난 2년 동안 온 나라를 뒤흔든 사건들을 거친 뒤 어떤 변화가 있는지 궁금해서다. 그런데 몇 년 전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기 부담스러워한다. 웬만하면 귀에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끼고 서로를 외면한다. 지난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모습의 흔적도, 올해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러 늘어섰던 행렬의 흔적도 찾을 길 없다. 어떤 ‘집단적 의식’을 치르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각자의 고립된 자리로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의 심정을 가늠해 보는 데 유용한 책 한 권이 있다. 여론조사 전문가 김헌태의 <분노한 대중의 사회>라는 책이다. 지난달에 나온 이 책은 200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여론조사를 통해 대중의 의식을 들여다본다. 저자는, 양극화로 고통받는 대중이 끝없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참여정부’는 지역주의 극복이니 정계 개편이니 하는 것들에 집중하다가 버림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새 정부 또한 ‘다 같이 잘살자’는 대중의 ‘공동체형 성장주의’ 열망을 철저히 외면했고, 대중은 분노와 좌절 끝에 ‘각자 살아남기’에 몰두하고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공동체는 무너지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생존 투쟁만 남게 생겼다는 것이다.

이런 정서를 대변하는 이들이 수도권 중간층이라고 하는데, 분노와 절망의 강도에 있어서는 이들보다 훨씬 더한 사람들이 있다. 대기업들의 위세에 밀려 더 갈 곳 없는 자영업자들, 내일 일을 모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일자리를 찾을 길 없는 젊은이들, 그리고 논을 갈아엎을 때나 잠깐 주목받는 농민들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서도 이 사회가 가장 모르는 이들은 단연 농민들일 것이다. 농민들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로 취급되기 일쑤였고 지금도 비슷하다. 이런 선입견은 우리가 아직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새마을운동 이전에 ‘새 농민’들이 있었고, 박 정권은 그들을 자신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동원했을 뿐이다. 이 사실을 역사학자 김영미의 <그들의 새마을운동>이라는 책은 담담하되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1950년대부터, 아니 그 이전 일제 때부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던 농민들이 있었음을 증언한다. 그들은 보수적일지언정 농촌 공동체의 운명을 스스로 해결할 의지가 있는 강인한 사람들이다.

21세기 초 한국 사회에서는 농민들이 의지를 발휘할 여지도 별로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서도, 얼마 전 사실상 타결된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에서도, ‘그들의 조국’은 그들을 버리고 공산품 수출을 택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면서. 어느덧 주름투성이가 된 ‘새 농민’들은 시장 개방을 무마할 지원금이나 바라봐야 할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분노한 대중의 사회> 저자가 지적하듯이, 많은 사람이 분노하는 건 단순히 빈곤 때문만은 아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고, 자부심을 느낄 수도 없을 때 더욱 분노하고 절망한다. 하지만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힘 있는 이들은 이런 정서를 여전히 잘 모르는 듯하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합리적인 선택은 ‘각자 살아남기’를 위한 ‘작은 투쟁’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진짜 해법이 못 된다. 없는 사람들끼리 싸우는 대신 손을 잡아야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지금 당장 우리를 먹여살려 온 농민들한테 손을 내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신기섭 논설위원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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